사회과학대학 제 28대 학생회장 선거 정책간담회 속기록

2009년 11월 19일 늦은 7시

(15분 늦게 시작함)

 

 

 

<< 개회선언과 민중의례 >>

 

선관위원장 (구현): 선거의 꽃 정간회이다. 선본에서 생각하는 학생회상, 우리에게 학생회를 맡겨준다면 어떠한 내용으로 해 보겠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시간. 이번에는 다른 분들을 패널로 초대. 선관위에서도 학우들을 대변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들 준비. 김부성학우, 학사정연에서 패널로 참여. 장애인권..에서는 딱히 질문할 것은 없다고 답변함. 페미니스트 액션에서는 오늘 참석하기 힘들다고 해음. 페미니스트 액션에서는 질문 보내옴.

자유롭게 토론 진행하면 좋겠다.

리바이브 선본의 총론발제. 10분 드리겠다.

 

후보 (지윤): 1. 시대 인식 - 위기의 시대

1.1. 경제의 위기

주식시장 관련 지표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이며, IMF는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상향 조정하고 있다. 정부 또한, 3분기 경제 성장률이 전기 대비 1%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과 함께, 반 년째 이어진 ‘불황형 무역 흑자’ 구조도 8월을 기점으로 서서히 끝날 것이라 발표했다. 심지어는 한국 경제가 1분기를 저점으로 상승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며, 향후 ‘루트(√)형’ 상승세가 예상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경기회복의 주원인으로 과감한 민생안정대책을 꼽고 있다. 정부의 현금유동성 공급 확대와, 빈곤층에 대한 사회보장 강화 등의 재정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경제 1/4분기 성장률이 타 국가에 비해 나은 것은, 일차적으로는 4/4분기 성장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격히 더 낮았던 때문에 반등폭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는 데(기저효과) 기인한다. 다음으로 대폭적인 환율상승로 인해 다른 나라들보다 수출 감소가 덜했던 것(원화가치 평가절하) 또한 영향을 주었다. 정작 경제영역의 근본적인 체질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이른바 경제의 불안정성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경제활동인구가 2465만 8천명으로 전년 동월대비 3만 4천명(-0.1%) 감소했고, 경제활동참가율은 61.6%로 전년 동월대비 0.8%하락, 취업자는 2372만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1만 9천명(-0.9%) 감소했다. 이는 97년의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이다. 경제활동인구의 지속적인 감소와 함께, 소득불평등 등의 경제정의와 관련된 지표들 역시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 노동소득분배율의 경우 외환위기 직전인 96년 최고점을 찍은 이후, 장기적으로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현재 산업 전부문에서 진행중인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으로 인해 향후 노동소득분배율은 더욱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이로 인한 유효수요의 감소와 거대자본의 무분별한 팽창은 영세자영업자의 소득에도 큰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노동자민중의 주머니가 점점 비어가고 있는 반면에, 생산재와 소비재의 탄력성 차이에 기인한 이윤 증가와 임금삭감, 자본 집중 등으로 10대 재벌 기업을 포함한 거대자본의 이익잉여금, 현금성자산, 사내유보금은 오히려 늘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지표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경제위기의 시기에도 자본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었으며, 재벌 기업을 위시한 거대 자본들은 오히려 경제위기를 기화로 이윤을 증대시켰음을 뜻한다. 또한 그러한 이윤의 증대가 평상시의 방식인 생산량 증가 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일어났음도 알 수 있다. 경제지표들은 하나같이 경제위기가 과연 누구의 경제위기인지 되묻고 있다.

경제가 불안정해질수록 민중의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인 복지와 노동 예산은 중요해진다. 그러나 정작 정부의 복지와 노동 관련 예산은, 건설 경기 부양 정책에 밀려 대폭 삭감되었다. 남한의 지배계급은 경제위기 시기마다 경기회복이라는 미명 하에 건설경기 붐을 자주 조장해왔으며, 4대강 정비 사업, 녹색 뉴딜, 그린벨트 일부 해제 등 정부에서 내놓은 정책들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의 시도가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정부에서는 홍수 예방과 수자원 확보라는 번지르르한 명분을 내세우며 4대강 정비 사업을 집행중이나, 그 근본적인 목적은 4대강 인근 지역의 부동산 개발에 있다. 팔당댐 인근의 유기농업 활성화지역을, 유기농업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주장 하에 개발하고 있는 상황은 정부의 4대강 개발 목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부의 각종 거대개발사업이 불러 일으킬 부동산 투기는, 당장은 경제 수치를 반짝 올려 대단한 성과를 이룬 것처럼 보이게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부동산 관련 투기자금은 이른바 서민경제로 환원되지 않으며, 부를 더욱 소수의 손에 집중시킬 것이다. 녹색뉴딜과 같은 개발사업이 민중들의 삶을 고용 불안과 생활수준 악화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가 미약한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최근 미국의 금융위기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부동산으로부터 시작된투기열풍과 거품경제는 잠깐의 화려한 외양을 남긴 채 붕괴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민중의 몫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개발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생태환경은, 인간이 유통시키는 어떤 종류의 화폐로도 보상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생태환경의 파괴는 인간의 생존조건 자체를 곧바로 붕괴시켜나갈 것이며, 그 가장 큰 피해자 역시 가난한 노동자민중일 수밖에 없다.

경제위기가 사회의 계급적․계층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최소한의 복지마저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권력관계의 하위에 위치할수록 경제위기는 더욱 큰 위협이 된다. 경제위기의 이러한 특질은 여성 노동의 문제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경제 활동참가율은 과거에 비해 분명 상승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형태의 여성 노동의 사회화는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여권신장과 비례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더욱 세련된 형태의 여남차별과 착취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남차별이 온존하는 상태에서 여성 노동 사회화가 어떤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는지는, 여성 취업률 증가의 실상을 파악할 때 명확해진다. 여성 노동의 대부분이 비정규직과 같은 불안정 노동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성의 취업이 주로 저수입 단순 서비스 직종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이전부터 지적되어 온 바다. 이는 남성 가장의 임금은 가족임금으로써 가족을 부양하는 비용인 반면, 여성의 노동은 소위 '반찬값 벌이 노동', 부차화된 노동으로 치부되어 저렴하게 착취할 수 있어온 데 기인한다. 경제위기는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하게 만들고 있으나,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있다. 이러한 상황은 서울시에서 진행중인 “여성이 행복한 서울” 프로젝트에서도 드러난다. 서울시는 여성취업률 향상이라는 구호 하에 병간호, 장애인활동보조 등 '돌봄노동' 관련 사회서비스 직종에 여성노동자들을 고용하였으나, 정작 여성노동자들은 시급 7000원에 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며, 높은 노동강도하에서 장시간 노동해야만 했다. 또한 돌봄노동을 여성의 생태적 특징으로 판단하는 가부장적 사고는, 여성에게 돌봄노동은 쉬운 일일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돌봄노동의 가치저평가라는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여성노동이 저평가받고 있는 한편으로는, 경제위기 시기 구조조정의 우선순위가 되어 어떻게든 노동의 영역 안에서 버텨내야 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희생이 존재한다. 소폭이나마 꾸준히 상승해오던 남성대비여성임금비율이 2008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하는 모습은, 여성노동이 경제위기 시기 어떠한 대우를 받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소득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했음을 떠올려 볼 때, 여성노동으로의 소득분배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다. 돌봄노동에 집중하고 '시집만 잘 가면 된다'던 과거의 여성억압 방식은, 현대에 맞게 재구성되어 여성을 억압한다. 가족임금의 사고방식만 남은채 임금삭감과 가족형태변화 등으로 가족임금의 실체가 사라진 지금, 여성은 돌봄노동과 함께 생산노동에서도 능력을 갖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중노동을 감수하며 임금노동의 구조 속에 자신을 끼워맞춘 이후에도, 여성과 여성노동은 차별과 저평가의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성노동은 분명 여성취업율과 같은 단순한 지표들로만 사고될 수 없다. 여남의 힘관계가 더욱 평등해져 여성노동이 지닌 부차적인 지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여성의 사회진출은 골드미스, 알파걸 등의 환상을 낳는 동시에 더욱 강력한 착취의 굴레로 여성을 몰아넣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1.2. 정치의 위기

노무현,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의 죽음은, 2008년 촛불이 사그라지며 함께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줄 알았던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다시 전면으로 끌어내었다. 현세를 떠나간 ‘민주주의’의 상징들을 기리며 누군가는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고, 또 누구는 국화꽃과 검은 리본을 준비했으며,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쏟아져나와 분향소 앞에 길게 줄지어섰다. 인산인해를 이룬 조문 행렬은 며칠간이나 이어졌고,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 날에는 참으로 간만에 시민들이 서울 시청 앞 광장을 가득 채웠다. 너나 할 것 없이 민주주의를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곳곳에서 서명운동이 이어졌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다시금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화두가 되었음에도 그 방식은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2009년 2MB정권 하에서 민중이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방식은, 투쟁을 통해 얻어낸 민주화에 대한 긍정과 낙관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민주화의 결함과 한계에 집중되어 있다. 즉, 민주주의와 관련된 정치적 담론은 유래없이 폭발하고 있으나, 그것은 민주화 시기의 민주주의 담론과는 분명 다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울 좋은 실용주의의 구호가 대중들을 효과적으로 포섭하고 있으며, 대중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 한국사회 정치에 대한 주된 평가였다. 그 와중에 발생한 민주주의 담론의 폭발적인 분출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단지 일회적이고 감정분출적인 이벤트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혹여 아래로부터의 정치, 민중으로부터의 정치가 소생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인가?

노, 김 두 전 대통령 사후 대중정치가 보여준 일련의 변화하는 흐름들은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내었다. 자발적으로 결집하였던 대중은 자신들의 분명한 요구를 집단적인 외침과 행동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전 대통령들을 애도하는 데 머물렀으며, 다시 시청 앞 광장을 떠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충격의 경험은, 앞선 세대의 사람들이 성취하여 우리 앞에 던져준 것으로 여겨져 왔던 민주주의를 재고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교훈을 시민사회 내에 심어주었다. 이러한 경각심의 확산은 각종 시민사회단체들이 시민들의 광범한 호응과 참여 속에서 민주주의의 전망에 대한 강연과 토론회를 열 수 있게 해 주는 등 유래 없는 민주주의 담론의 확산을 낳았다. 이처럼 최근의 대중정치의 모습이 긍정적인 지점과 부정적인 지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에, 그것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현재 대중정치의 흐름이 보여주고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고, 문제점은 적절히 시정하는 것이다.

대통령 사망 정국에서 드러난 현 시기 대중정치의 본질적인 한계는, 남한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폭발적인 애도의 물결은 있었으나,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을 발본색원하려는 움직임은 애도만큼 결집된 행동으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집단적인 움직임이 아닌 파편적이고 개인적인, 미시적인 차원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다음 아고라와 같은 포털 사이트 등에서 범람했던 급진적인 구호들이, 정작 길거리에서는 외쳐지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실제로 노, 김 두 전 대통령의 문집과 서간집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진보적인 강연회와 행사들이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많은 경우 이러한 행위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요구가 아닌, 슬픔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되었다. 이는 대중정치가 소위 정치라 불리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개인적 감정의 분출과 같은 사적인 영역에만 머무르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를 두고 정치의 공사분리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의 대중들이 보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구호는 경제위기 시기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정치적’인 것이고, 다소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 애도하는 행위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상적이고 사적인 행위이지만, 구호를 외치며 광장으로 나서는 것은 위험하고 불순하며 감수해야 할 비용이 매우 큰 정치적인 행위로 판단되었다. 정치는 공적 영역에 속해있는 ‘직업’ 정치인들이나 직업 ‘데모꾼’ 들의 몫이지,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순수한 시민의 몫이 아니라는 사고가 넓게 퍼져있었다. 이러한 분할적 사고가 정치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의 영역을 단절적으로 갈라놓으면서, ‘시민의 정치참여’에는 무언가 불순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낙인이 찍혀졌다. 시민은 일상에 충실하면서 거기에 머무를 때 진정 ‘시민답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사분리의 귀결은 정치에 대한 냉소 · 희화화의 증대와, 일상과 정치 사이의 가치편향적인 선긋기의 고착화로 나타났다. 두 전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애도의 물결이 비록 매우 사적이고 감상적인 것으로 포장되었지만, 그것은 분명 각자의 적층된 고민이 결정적인 계기를 맞아 표출되어 나온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외양과 실재의 충돌을 너무나 잘 알고있던 대중은, ‘깃발 따라가지 말라’는 말로써 자신들의 ‘순수성’을 담보하려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중이 기존의 정치상황과 정치 방식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는 행위였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구성하려는 원시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기성 정치에 대한 반경향으로 등장했던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는, 기성 정치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마저도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는 직업 정치인이나 하는 뻔한 이야기라는 인식은, 대중이 스스로를 정치화될 수 없는, 또는 정치화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여기게 했다. 이러한 현상은, 빈곤과 여성차별과 같은 직업적 정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나는 지배계급의 전략적 성과물들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민중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안들이 공론화 · 쟁점화 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그러한 구분선을 지우고 대중에게서 일상과 정치의 관계를 반대 방향으로 전도시키는 것, 즉 정치에 방점을 찍는 것이 대중정치 활성화를 위한 해결책이 될 것인가. 그것은 대중이 가진 기성정치에 대한 환멸을 결코 시정해내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또다른 형태의 정치의 붕괴로 귀결될 뿐이다. 해결책은 오로지 일상과 정치를 분리하고 있는 현 상황을 극복하는 데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의 대중정치의 위기가, 지배계급의 차별 · 배제전략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통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지배계급은 대중의 저항을 미리 방지하고 또 무력화시키기 위해, 대중을 다양한 전선들로 분열시킨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의 자유롭고 발전적인 경쟁이라는 평등의 외피를 내거는 한 편으로, 그 이면에서는 차별과 배제를 통해 대중을 분할하는 기만적인 포섭 전략을 펼치고 있다. 달갑지 않은 온갖 꼬리표가 붙는 순간, 대중은 외부에서 그어 놓은 수많은 전선들로 분할된다. 비정규직이라고 규정되는 순간 그/녀들에게 정규직은 연대해야 할 동료 노동자라기보다는 반목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나고, 이주노동자라고 불리는 순간 그/녀들은 ‘토착’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달갑지 않은 ‘굴러온 돌’이 되어 버린다. 극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이 ‘알파걸’이라고 불리는 순간, 수많은 여성들은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구호 하에 기꺼이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자기계발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수많은 세입자들은 철거민들이 ‘도심 테러리스트’의 모습을 하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떼’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빨리 내 명의로 집 한 채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녀들의 고민은 어디까지나 먹고 사는 데 관련된 '일상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차별과 배제의 원리는 이른바 일상적인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가장 명료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과 정치를 철저히 분리하는 공사분리 이데올로기는, 일상에서의 차별과 배제가 ‘정치적’인 문제제기의 대상이 아니라고 사고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들이야말로, 대중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정치적 사안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대중이 이러한 지점들을 논할 때, 옹호든 비판이든 대중은 정치적인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며, 그 자체로 정치적인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별과 배제가 난무하고, 이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실천 역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지금, 왜 오히려 정치의 만개, 민주주의의 성공이 아닌 정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한계가 논의되는가? 차별과 배제의 포섭 원리가 대중의 일상에 구석구석 침투하여 있고, 확대재생산을 통해 대중의 삶을 구속하고 규정짓고 있음에도 그에 대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부적합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사태,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정치의 위기다. 설령 어떤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고 해도, 나를 대표하는 ‘직업 정치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생각하고 나는 다시 ‘일상’에 열중하려는 태도, 그러면서도 정치에 대해 냉소하는 태도가 바로 정치의 위기다. 정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었던 두 전 대통령이 죽었기 때문에 갑작스레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일상에서 맞부딪치는 차별과 배제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 불만과 고민을 발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정치의 위기는 상존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두의 화두가 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의미는 재고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누군가의 냉소적인 한마디처럼, ‘민주주의’를 누군가가 내게 ‘밥’ 먹여주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한, 그것은 일상과 유리된 채 매우 대리주의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으며, 결코 정치의 대중화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공사분리 이데올로기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적 영역에서의 차별과 배제가 정치적 과정으로 사고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정치의 위기다.

 

1.3. 여성의 위기

여성의 권리는 역사적으로,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탄압받아왔다. 소수의 권력자가 아닌 대중이 비로소 정치의 장에 등장하게 되고, 대중의 수많은 정치적 권리들이 참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보장되었던 시기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여성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시기, 몇몇 선구적인 여성들을 제외하면 여성의 참정권은 '모든 사람' 즉 남성 일반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이후에 '부여'되는 것으로 사고되었다. 참정권과 같은 대리적인 정치 참여가 아닌, 직접적인 정치참여 과정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권리는 으레 사회혁명의 결과로 자연스레 보장될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실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때에도 성차별 문제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혁명의 주역이자 중요한 시발점이었던 여성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 같이 혁명 이후 확실하게 향상된 정치적 권리들을 보장받지 못한 채 다시 집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타의 사회체제들이 여성 억압이라는 현실을 변혁해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현재의 여성 억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지배적인 구조인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전근대와는 다른 방식의 여성 억압 구조를 만들어나갔다. 자본주의는 성차별을 토대로 가족임금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냈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의 노동은 무급노동이자 당연히 해야 되는 노동이 되었다. 가족의 부양자이자 임금을 지급받는 사람으로서 남성은 더욱더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받게 되었고,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련 없이 시집을 잘 가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물론 가족임금제도는 어느정도는 노동자민중 자신의 요구이기도 했다. 가족임금제도 성립 당시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자며 가족 임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노동해방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산업 혁명 이후 여성들은 가장 싼 값으로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취급받았으며, 가사노동 등 제반 재생산노동을 무급으로 담당하는 주체가 되었다. 가족임금제도를 통해 이루어진 가족 제도 하에서 여성 노동의 가치는 추락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자본은 자기증식에 필요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 억압의 모습은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았다. 가족제도의 변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산업혁명 이후 빅토리아적인 가족은 아메리카 핵가족으로 변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부르주아 가족이, 개인의 성욕을 인정하지 않으며 가족을 극히 도덕적인 관계로 상정했던 반면, 아메리카 핵가족에서는 배타적인 연애관계를 토대로 '서로에 대한 끌림'을 통해 가족이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여성권의 신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 핵가족은 기본적으로 이성애 중심적인 어떤 "알콩달콩한" 가족관계를 상정할 뿐만 아니라, 가족 내부에서 여성의 역할은 다시금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당연한 주체로 자리매김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들의 위치는 어떠한가?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여 혼란 그 자체이다. 남한에서는 확실하게 남성만이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지도 않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남성이 임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며, 받아야 한다는 사고가 만연해있다. 여성의 노동력이 싼값으로 동원하기 쉽기에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던 것처럼, 경제위기 시기인 지금에도 여성 노동력을 쉽게 동원하고 있으며, 여성 노동의 가치는 아직까지 평가 절하되어있다. 이처럼 여성 억압이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특히 주류 매스컴은 성공한 여성도 많다는 식의 홍보를 통해 이러한 비난에 앞장서고 있다.

이렇듯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극도로 권력화된 구도 속에서 나온 것이, 여성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들인 성폭력이다. 성폭력은 여성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주체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객체화시키는 데에서부터 발생한다. 성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은 포르노그래피이지만, 성폭력은 단지 포르노그래피에 한정되지 않는다. TV 프로그램이나 주위에서 여성은 웃기는 주체가 아니라 웃어주는 객체, 또는 (남성 위주의 상황에서) 분위기를 좋게하는 하나의 배경으로 생각하는 것도 여성을 객체화시키는 것이다. 성폭력적인 상황이 문제제기되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 하에서, 자연히 여성은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인식된다. 자연스레 사내에서의 원치않는 스킨쉽도 여성이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되고, 회식 자리에서는 직장 상사에게 술을 따라주는 존재가 되어야 센스있는 여성으로 인정받는다. 결과적으로 '예쁘면 모든게 다 해결된다'는 인식들이 생겨나고,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성격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받게 되는 상황을 만든다. 분명 하나의 인간인 여성이, 물질처럼 사고되고 또 그렇게 대우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는데 무엇을 더 바라냐는 남성중심적 비판들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으며, 정치적으로 이를 발화해내는 주체가 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시기라고 불리는 지금의 시기에서 여성들은 보다 세련된 차별과 착취들을 경험하고 있다. 골드 미스나 성공한 여성 CEO의 모습들과는 상관없이 나의 연애는, 나의 삶들은 아직 B급이다. 널리 이야기 되는 것은 여성들의 지위상승이고, 똑똑한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지만, 내 주위의 모습들은 "너는 절대로 나처럼 살지 말라"는 어머니의 거친 손과, 여성은 어떻게 하든 사회생활을 할 때 남성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들이다. 더불어 남자 친구나 남편보다는 성공하지 않았지만, 능력있고, 가사노동만 하는 주부는 아니지만 음식과 청소도 잘하고, 애교도 있는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는 일명 “킹콩걸”이 요구되고 있는 시대이다.

서울시가 여성을 위한다며 집중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여행 프로젝트가 있다. 하이힐이 빠지지 않는 도로를 만들겠다, 여성들이 밤길에도 안전할 수 있게 가로등을 추가 설치하겠다, 여자 화장실 안에 남자 아이가 소변을 볼 수 있는 변기를 설치하거나 기저귀 교환대를 만들어 주겠다 등이 여행 프로젝트의 요지이다. 하지만, 소위 이러한 '복지사업'들이 정말로 여성을 행복하게 하는가? 물론 가로등이 더 있으면 밤길을 다닐 때 조금 더 좋고, 걸어다니며 하이힐이 빠지지 않으면 조금 더 편안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은 가로등이 없더라도 성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인 것이고, 여자가 밤늦게 어디를 돌아다니냐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여성에게 일종의 '시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여성이 행복한 사회인 것이다. 여성 프로젝트와 같은 시도들을 보며, “서울시에서 여성을 위한 정책도 내놓는구나, 우리 사회도 이제 남녀 평등해졌어”라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정책들이 정작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축소시켜버리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성 억압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의 날에 여자친구에게 초콜릿을 사주는 것, 매너남이 되어 세련되어지는 것이 여성주의인 것처럼 왜곡되어 발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중적으로 여성주의가 발화되는 방식들과는 다르게, 여성 억압과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논하고 분석하는 것은 소위 여성주의에 경도된 "꼴페미"들의 입장으로 간주되고 배척된다. 여성의 문제가 '시혜적'으로 사고되고, 정작 여성들의 문제와 여성 억압의 구조에 대해 발화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 여남평등을 위한 실천의 첫 고리가 끊어지고 있는 상황이 바로 여성의 위기이다.

 

2. 혼란: 잃어버린 꿈들은 어떠한 모습이 되었는가

2.1. 모든 것의 상품화와 진동하는 학생사회

근 몇 년 간 ‘대학인’을 규정해 왔던 단어들은 자기계발과 예비실업자 정도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하게 되는 가장 큰 고민은 취업이었고,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혀 있는 것들은 높은 학점과 ‘스펙’을 위한 학원이나 스터디, 동아리 일정이었다. 특히, 여학우에게는 불안정한 (남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외모 관리마저 강제되어 왔다. 그렇다. 취업 걱정에 속박 받고 자기계발에 매몰되어버린 존재,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나 당연해져 버린 상황이 2009년 대학인의 자화상인 것이다. 이제 사회에서는 대학인들이 과거와 달리 사회와 인간과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질타한다. 소위 ‘진보적’인 지식조차도 스펙의 일환으로 다룰 뿐, 아무도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는 ‘엘리트로서의 미래’가 보장된 것으로 여겨지는 서울대 학생이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다. 서울대 졸업장이 취업을 (완벽히)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나자, 학우들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학과에 진학하여 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경쟁력 있는 학과(로)의 전과 또는 복수전공 역시 어느새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나아가 차별화된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한 순간도 여유로울 수 없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386이라 불리는 기성세대 중에서 지금의 대학인들에게 따끔한 일갈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지적도 반복되다 보니 진부해져버린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한 번 주위를 살펴보자. 아니, 주위 학우들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자. 정말 그러한가? 2009년, 대학인들은 그렇게 자기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것들에는 철저히 관심을 끊어버린 채 자기계발에‘만’ 매진하며 살고 있는가?

진리만 추구하기에는 너무나 팍팍해져버린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그/녀들의 불안감은 실존한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스펙에 목을 매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지난 2년간 학내에서 학우대중들의 관심사가 되었던 문제들을 돌아보자. 이명박 정권은 남한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하겠다고 나섰고, 그 개조 과정에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로 여겨졌던 자유와 민주주의, 생존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계기로 취임 백 일만에 정권 퇴진 구호가 광장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중 ․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촛불은 대학생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사회는 대학생들을 ‘부끄럽다’ 했다. 서울대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학생회의 ‘미적지근함’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와 같이 ‘깃발’ 아래 모두가 모여서 나가지는 않았지만, 많은 학우들이 광장에 나서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뿐만이 아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나고, 쌍용자동차 투쟁이 벌어지고, 법인화 쟁점이 터지면서 학우대중들은 다시금 학내외 현안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자기계발에 매몰된 존재’로 규정되어 왔던 학우들이 실제로는 사회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이제 학우대중들은 ‘진보적인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학우들의 고민은 ‘혼란’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학우들의 혼란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학우들은 사회에 대한 정치적 인식과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설계 속에서 ‘헷갈려’ 한다. 내 불만과 내 분노와 내 실천이 ‘정치적’이 되는 건 꺼려지지만, 불만의 표출이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에 매몰되기‘도’ 하고, 자기계발을 부추기고 기본적 합의들을 파괴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도’ 가지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학인들의 모습이다. 너도나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반납하고 고시와 취업을 준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우들의 욕구나 불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스누라이프나 블로그에 글을 써보기도 하고,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만 같은) 자신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일상의 방향 전환을 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게 현실이다.

이렇게 학우들이 혼란을 느끼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인들의 삶은 점차 불안정해져 왔다. 많은 학우들이 취업을 위해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취업에 성공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는 다양한 수치들을 통해서도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최근 조사 결과 대졸신입직원의 평균 나이는 남성 만 28.7세/여성 만 25.6세로 나타났다. 이는 10년 전 26세/23.5세보다 각각 2.7세/2.1세나 증가한 것이다. 더구나 600여개 상장 기업들을 대상으로 2009년 채용계획을 설문한 결과, 인턴사원은 지난해보다 약 4배 늘어날 것으로 나타났지만 정규직 채용은 40% 감소할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조사결과를 대변하듯 청년층 고용 비율은 올해 7월 41.8%에 머물렀고, 청년층의 취업자는 2004년 12월 이후 56개월째(2009년 8월 기준)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는 통계 또한 발표되었다. 경제위기와 맞물린 지금의 불안정한 현실은 우리의 삶을 하루가 다르게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논란이 되었던 서울대 법인화 추진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듯이, 이제는 대학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근 10년 간 대학인들을 상품으로 만들어 노동 시장에 내놓기 위한 과정으로서 대학이 존재해왔다면, 법인화 이후의 10년은 대학 자체가 상품이 되어가는 기간이 될 것이다. 서울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에서는 이미 (상품으로 취급될 수 없을 줄만 알았던) 지식과 학문에 서열을 매기고 ‘값’을 책정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학교가 지주회사를 설립해 매각 차익으로 수익을 내겠다는 발상이 버젓이 학교 소개 홈페이지에 게재되고 있으며, 최근 서울시내 모 대학에서는 신입생의 1/4 이상을 경영학과로 뽑는 ‘학과 구조조정’ 안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학과 홍보는 ‘취업 전망 밝음’에서 그치지 않고 ‘기업 지원이 많음’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법인화는 전면적으로 드러내놓지는 못하고 진행되어 오던 이 과정(들)을 당당하게 양지로 끌어낼 것이다. 그 결과 서울대는 점점 더 돈 많은 학과, 돈 많은 이들만의 공간이 되어 갈 것이다.

대학만 상품화되는 것도 아니다. 용산 참사는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인 주거공간이 상품화되면서 벌어진 참극이었고, 쌍용자동차 점거 파업으로 폭발했던 노동자 해고와 그에 따른 죽음은 기업 회생의 대가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상품으로 거래한 결과였다.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기초적인 권리, 더 나아가 생존할 권리마저도 상품화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에 낀 거품으로 인해 생긴 경제 위기를 더욱 더 많은 것들을 상품화시키는 금융 활성화를 통해서 되살리겠다고 하는 모순적 경제정책 속에서 노동자, 민중, 대학인들의 생존권은 위협당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대학인들에게는 어떤 것이 요구되고 있는가? 바로 답을 내리자면, 대학인들 스스로 자신을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하던 과거와 달리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라’는 보다 세련된 표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꿈을 가져라’, ‘비전을 가져라’, ‘생각대로 살라’는 이야기들로서 말이다. 표현만 두고 보자면 맞는 말 같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내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에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인들은 지금 정말 ‘생각대로’ 살고 있는가?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이 원하는 인간관계, 자신만의 특색 있는 지점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자기계발서에서 이야기하는 ‘꿈’이 조금 더 좋은 직장에 가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연봉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가진 다양한 꿈을 접고 스스로를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직업에 따라 조금 더 자유로워 보이는 것에 만족하라는 유혹일 따름이다. 결국, 많은 자기계발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꿈은 진정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꿈과 내가 꾸는 꿈이 괴리되고 있음을 느낄 때, 사회에서는 선택을 요구한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거나 각색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꿈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도태’되든지 말이다. 이렇게 이분법적이고 위압적인 선택지 앞에서 대학인들은 선택을 유보하고자 한다. 이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적극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개인적 참여와 진보적 관심 정도에서 그치려고 한다. 본인의 꿈과 욕망이 제약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더라도 우선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취업 또는 성공 이후로 그 고민들을 미루고자 한다. 이처럼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스스로를 상품화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의 압력과 자신이 그리는 삶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바로 혼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2.2. 학생회 그리고 우리의 사회대

지금의 청년실업, 비정규직, 법인화 문제 등에서 드러나는 위기들은 학우 개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흔히 말하는 ‘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계발이라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이 위기를 일정 정도 해소하거나 피해갈 수 있을지언정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극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학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 선택지들 중에 ‘학생회’ 또는 ‘대학사회’는 보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지금의 대학에서 ‘정치’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내에서 집단적인 고민과 논쟁, 그리고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등록금이 올라가고, 소수 학과가 존폐 위기에 처하고, 자치 단위의 공간이 사라지고, 학내 성폭력 문제가 나타나더라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특정한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공동체가 내부의 다양한 문제를 토론을 통해 해결해 나가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 위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정치의 장’을 복원시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이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은 추상적인 당위 명제를 반복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학생 사회라는 공간이 사라지고, 학우들 사이의 정치가 자리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과거 학생회는 학우들의 일상을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만들어내는 운동을 조직하는 기구였다. 그것은 단지 일부 운동가들의 선동이 아닌 당시 학생사회 자체에서 나오는 요구였으며, 동시에 전체 사회의 요구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학생회의 현실은 답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학우들 사이에서 여성 ․ 장애 ․ 교육 ․ 인권 ․ 환경 ․ 문화 ․ 일상과 같은 새로운 담론들이 등장하고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때, 학생회는 기존의 ‘운동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점차 고립되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대학인들의 삶이 새롭게 재편될 때마저 학생회가 학우들의 삶에 천착하여 그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서 점차 더 축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학우들의 혼란과 고민을 학생회에서 제대로 담아낼 수 없게 되면서 학우들은 자신의 ‘정치’를 일상과 연계하기 보다는 ‘다른 누군가’에게 유예하기 시작했다. 일상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학우들은 점차 직접 이야기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정치행위로 여겨지는 활동들을 학생회에서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동시에 학생회를 꾸려가는 학우들 역시 자신들의 활동이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친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서 학생회를 하는 사람도, 학생회를 하지 않는 사람도 모두 학생회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들을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학생회에 대한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학우대중을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이를 학생회에서 일방적으로 ‘선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학우들이 느끼는 ‘양가적 혼란’을 포착하고 그 일상에서 벌어지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학우들이 진보적 실천과 나름대로의 삶을 꿈꾸지만 자기계발적 삶이 강제되는 현실의 제약 속에서 개별화된 실천에 머물게 되는 현실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또 인터넷과 같은 공간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학우들의 대안적 상상력과 그 분출을 발견하고, 그러한 감수성과 인식이 의지를 잃고 좌절되지 않도록 지지하고 새로운 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학생회의 시대적 과제임을 인식해만 한다. 따라서 학우들의 직접적 지지와 행동을 끌어내지 못하는 ‘알맹이 없는 대안’이 아니라, 우리의 발화를 구체화시키고 그것을 소통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대안’이 필요하다. 학생회라는 공간 속에서 나의 미래, 삶, 괴리감과 혼란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을 수 없다면 학우들과 학생회의 괴리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들어가 2009년 ‘우리의 사회대’가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기층단위’라 불리는 논의의 공간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학내외의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발화하던 공간들이 실종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대여성주의연대와 같이 기층에서부터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여성 주체들의 운동이 지속되지 못하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나, 학우들이 제일 처음 대학생활의 터전으로 자리하는 과/반에서 학회와 학생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거나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현실은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자신과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찾아 놓아야 하는 공간으로서만 과/반이 존재할 뿐, 인간관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찾기 힘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회 역시 학우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새로운 공간과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학생회는 그저 학우와 분리되어 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다른 관계들을 찾기에는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운동권’의 자보를 보고 학우들 사이에서 소소한 토론이 진행되곤 하지만, 그러한 학우들의 관심을 뒷받침하고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부족한 것이 오늘날 사회대의 현실이다.

그러나 학생회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고민들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공간이 학생회인 것이다. 지금의 학생회에서 적어도 해방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혼재하고 있다.

 

선관위원장 (구현) : 좀 줄여서 빨리 해달라.

 

학생회장 후보 (지윤) : 네, 알겠습니다

3. 2010 우리의 답답함들을 걷어낼 수 있는 전략

지금 남한에 불어 닥치고 있는 경제위기에 대해 지배계급은 위기가 전가되는 대상을 분할시켜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이윤이 나고 있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조금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식으로 경제위기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렇기에 분할되지 않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청년실업/ 여성 노동자가 분할되어서 각각 살아나갈 방도를 찾아나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누군가 소수에게는 성공의 문이 열리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내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대에 대한 저항의 욕구는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곳곳에서 나타고 있다. 수많은 분할선들 때문에 집단적인 저항으로 표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시대를 요구하는 열망은 학생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보편적 권리, 이 생동감 넘치는 열망은 노무현 추모와 법인화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혼란 속에서 쉽게 캐치되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열망들은 자신을 분노케 하는 것들에 대해 인터넷에 자신만의 철학을 털어놓기도 하고, 자신의 억압하는 사회에서 해방되기 위해 여행을 가기도 하는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차별과 배제는 당연히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마음 때문에 스펙도 쌓으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지들 안에서 학생회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 이상 집단적 실천을 꿈꾸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학생회들이 여성주의를 이야기하고,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지만 학생회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곳이라는 생각들 때문에 쉽게 나의 답답함을 덜어내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였다.

2010년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혼란들을 걷어내야 할 시기이다. 정치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이 강한 이 시기에 다시 정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올바른 토론문화를 정착하자라는 말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파시즘의 징조는 많은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시대인식 부분에서 확인했다. 이러한 파시즘의 징조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에서도 나타나지만, 다른 곳에서는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제와 자신들 만을 위한 선긋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는 경제 위기 시기에 적응한다는 것이 그저 말 그대로 ‘적응’일 뿐 밝은 미래를 그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어도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그려볼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직 학생사회는 희망이 있다. 서울대인 3000명 시국선언에서 보듯 비록 학생회가 선택되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대학인이라면 이 정도는……’ 이라는 인식이 다시금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저항의 맥박은 대학사회 내에서 살아 뛰고 있다. 그렇다면 학생회의 모습은 이 시대의 혼란을 걷어내는 모습으로 변화해야 한다. SNU 학생 고객들을 더 나은 서비스로 모시는 것들은 학생회가 아닌 기업들이 하는 일들이다. 이제는 다른 문화들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가르는 문화가 아닌, 함께할 수 있는 대안 문화를 학생회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또, 그대들의 답답함은 끊임없는 자기계발이나 봉사활동으로는 해소될 수 없었기에 이제 혼란의 원인들을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학생회가 요구받고 있다.

 

>>> 혼란의 원인을 밝혀내고, 일상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내자.

앞에서 분석했듯이, 지금의 대학인의 달라진 관계가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은, 세련되게 가해지고 있는 폭력들이 은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 문화라는 것은 은폐되고 있는 폭력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회대 내에서 없어져가는 합의의 모습들이 우리 일상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면 그 일상부터 바꿔야 다른 답답함들까지 걷어낼 수 있다. 그 답답함들이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 하는 긴장감이라면 경쟁이 아닌 다른 관계들을 학생회는 이야기해야 한다. 기존의 관계가 나와 다른 누군가, 또는 권력관계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끊임없이 누르면서 경쟁하는 관계였다면 우리가 혼란을 걷어낼 수 있는 관계는 기존의 모습과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대학 생활 내에서만 이러한 자유로움이 이야기되고, 그 후엔 나의 삶이 똑같이 무료하고 답답하다면 굳이 다른 방법들이 아닌 학생회가 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학생회의 역할은 학우들의 삶이 학생회와 함께 방향전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처럼 학생회는 자신의 자리에서 가만히 있고, 오지 않는 학우들을 원망한다면, 함께 서로의 삶을 방향전환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모이기만 해서는 학생회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총학생회를 통해 보아왔다. 그렇다면 폭력의 원인들을 밝혀내고, 지금 학생사회에서 보이는 실천과 생각의 괴리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실천들을 만들어내는 학생회가 답이다. 이제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택해보자.

 

>>> 정치의 문턱을 낮추어 논쟁과 토론을 복원하자.

높은 정치의 문턱을 낮추어야 다른 학생회가 가능하다. 학우들이 들어올 수 있는 더 많은 계기들과 통로를 만들었을 때 앞에서 이야기 되었던 답답함을 걷어낼 수 있는 원인분석이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정치와 분석을 할지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아나가는 것이다. 학우들과 함께하는 방향전화를 하기 위해서라면 원인분석은 지금껏 학생사회의 혼란을 속 시원히 풀어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학생회에서 함께 중단없는 상상들을 시작해야 한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감이 지금까지 홀로 외로이 뛰고 있었다면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그 맥박들이 함께 뛰는 광장이다.

 

>>> 다른 공동체, 페미니즘으로 시작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익보호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공동체가 페미니즘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공동체 내의 관계맺음이 달라짐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일상과 정치를 분리하지 말자/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페미니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앞의 시대 인식에서 보았듯이 지금의 혼란의 시대는 여성의 위기, 그리고 관계맺음의 위기를 통하지 않고서 설명될 수 없다. 경제위기 시대의 자본은 여성에게 일과 가사 두 부분 모두 책임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남성들에게는 돈을 많이 벌고 학력이 높아야 한다는 압박이, 여성에게는 킹콩걸이 되라는 압박이 가해지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사회대 학우들의 삶을 분석할 수 있는 언어인 것이다.

사회대 공동체는 페미니즘을 필요로 한다. 여성이나 성 소수자의 경험은 보편적이거나 논리적인 주장이 아니라고 공동체에서 배제 받아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공동체가 아니다. 아래로부터 민주주의의 원칙은 이처럼 차이 때문에 발화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나오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직접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공간이 학생회라면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것이다.

 

선관위원장 (구현) : 시간을 넉넉히 드리고 싶으나 각론 6개에 질의응답도 있다. 양해해달라. 총론발제에 대해 질의응답이 있으신 분?

 

좌중 침묵

 

선관위원장 (구현) : 없나? 다섯을 세고 없으면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각론발제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교육/여성/노동/학생회 및 학생사회/문화와 공간/생태 환경. 각 각론당 5분씩 드리겠다.

 

리바이브 선본짱 (준용) : 0. 들어가기

학생회 선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왜 학생회에 주목하며 어떠한 학생회를 만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 시기의 학생사회에 대한 분석과, 학우들 사이에서 학생회가 어떠한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번 학생사회 각론에서는 학생회라는 공간이 최근 몇 년간 어떻게 비/반권 세력에 의해 규정되어 왔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작년과 올해를 경유하며 그것이 변화했던 양상, 2010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최종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학생회의 목표와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1. 2009 학생사회 분석

(1) 'VISION 2025' - 21세기 들어 변화한 대학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남한의 모든 대학들은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공세적으로 퍼붓는데 여념이 없다.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등록금을 더 올릴 구실,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울 플랜, 대학 배치표에 좀 더 위 칸에 위치하고자 것일 뿐이었다. 대학들은 교육이 상품임을 자신 있게 천명하고 있으며, ‘더 질 좋은 교육이라는 상품을 더 많은 돈을 주고 사는 게 뭐가 나쁘냐?’는 말이 이제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2010년의 비전을 각자 앞세우며 성과를 내겠노라고 미래의 희망을 팔았던 대학들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학과 구조조정, 기초학문의 파괴, 교수들의 성향분석을 통한 학풍마저 바꿔 버리기만으로도 각 대학은 일정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였는데, 앞으로 더욱 심화될 신자유주의 교육 구조조정의 조건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단결을 더욱 도모하게 해줬고 장기적으로 남한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 이다. 나름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를 갖고 있던 대학의 신자유주의 교육 재편으로 드러나는 이후의 폐해는 민중들의 삶에 고스란히 이전될 것인데, 현재 측정되지 않는 위협의 종류는 다양하다. 오른 등록금으로 인해 빚더미에 앉아 사회로 나간 청년들과 가계를 탕진한 가정들 역시 그 위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대학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각 학교의 캠퍼스 신설, 학과 구조조정과 재배치, 대학 통폐합이 지속될 전망이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본격 궤도에 오르게 될 국립대 법인화는 이제 각 지역의 국립대에게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법인화에 따른 경쟁에 참여하는 것은 도태되지 않기 위한 필수 과정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각 학교는 더욱 더 효과적이고 간편한 학교 내 구조조정을 달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자치를 탄압할 수 있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내고 있는데 이들의 목적은 학내 학생들의 자치활동,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자치 동아리나 학생회에 대한 지원은 줄어가고 학생들을 위한 지원은 학과 내의 취업동아리, 학교가 지원하거나 멘토 교수님과 함께하는 공모전 동아리들 뿐이다. 사회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대 동아리들은 칸막이로 나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세 동아리가 나누어 써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며, 그마저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또한 소수 과를 제외하고는 과방이나 과 자치회실이 존재하지 않아 과 학생들끼리 16동 내에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전무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16동 앞에 제 3 신양학술정보관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자치공간 확대에 대한 기대가 높았으나, 본래 학생들의 자치를 위해 만든 공간이 아니라고 하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공간이 학생들에게 할당될지는 의문이다. 한편 성균관대의 경우는 3년 전부터 학교와 농협이 주최하는 농촌봉사활동에 지원금을 주고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농민학생 연대활동을 정치활동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고 있다. 성신여대의 경우에는 외부 단체에서 강의실을 빌릴 수 없게 하는 것은 물론 학교의 학생들이 대여하는 경우에도 외부인이 한명이라도 참가할 시 사용료를 지불하게 할 방침이라고 한다. 중앙운영위원회나 총투표를 통해 발의되거나 가결된 안은 학교의 일방적인 통보에 따라 무시당하기 일쑤고 몇 해 전부터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름으로 새로배움터에 참가해야 하는 새내기들의 연락처도 주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다. 과를 통폐합하고 축소하면서 이전의 과방을 열람실로 변경하거나 없애버리는 것, 밴드의 연습공간을 소음을 이유로 폐쇄하는 일들이 각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학교의 이러한 행태는 교육의 상업화를 위한 구조조정과 이를 저지하려는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플랜에 기초하고 있다. 이를 막아내는 투쟁을 벌이지 않고는 학내 정치는 그 운신의 폭을 계속해서 좁혀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앙대학교는 다음 달 중으로 경영, 의대, 공대, 로스쿨을 집중 육성하고 기초학문은 사실상 포기하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투입해 학교를 이른바 ‘발전시키는’ 과정에는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 자치와 연대의 공동체는 발붙일 곳이 없다. 따라서 이를 막아내는 투쟁을 벌이지 않고는 학내 정치는 그 운신의 폭을 계속해서 좁혀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시지프스의 하루, 하지만 우리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들었던 이야기는 88만원 세대라는 호칭이었다. 시대인식이 없고 책임감이 떨어지는 세대, 인내가 부족한 세대...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입시교육, 조기교육에 지쳐있는 세대에게 더 빨리 자라라는 어른들의 투정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호탕하게 세상을 호령하던 세대도, 미래에 대한 걱정과 의심이 없던 세대도 지금 이 시대의 청년은 아니다.

‘청년들은 너무 자주 미래에 의해 방해 받는다’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살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하지만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약속은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냉정한 현실이다. 끊임없이 경쟁을 내면화하고 초중고 시절 내내 사교육으로 교육받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토익학원부터 각종 자격증 학원을 뺑뺑이 돌며 한편으로는 과외선생님으로서 사교육 시장의 한 축이 되는 대학생들은 꿈조차 사랑조차 사치스럽다고 이야기한다. 생산적인 어떠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잉여인간’으로 자신을 재빨리 규정하고 패배감을 내면화하며,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마음이 편한 지금의 청년들은 꽤나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20대에게 한 평의 집도, 괜찮은 미래도 쉽게 약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촛불이라는 정치적 반란의 시기도 시작은 10대에게 마무리는 386에게 빼앗긴 20대는 통째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것 같기도 하다. 동아리도 ‘스펙’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시대, 야망은 적고 상처는 많다.

이러한 좌절과 상처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2009년 청년들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한다. 끊임없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 위로 올려놓는 노동을 반복하는 시지프스, 21세기의 시지프스들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를 산과 바위를 고르고, 바위를 굴리는 방법을 학습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좀 더 좋은 산, 바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일까.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는 시지프스들은 스스로를 ‘중립’으로 규정지으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투여된 노력만큼의 분명한 성과를 끊임없이 구별할 것을 교육받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더 많은 개입으로부터 셔터를 내리고 외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공간을 찾고 인정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모두에게 이것은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일 뿐 이다.

하기에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듯한 청년의 모습만 눈앞에 보일지라도 청년들은 세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세계화의 거대한 피해자가 누구고 누가 전쟁으로 돈을 벌고 누가 생명을 잃는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어디에나 숨어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포기하기 쉬운 때일수록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마음과 계획이 절실하다. 나 혼자만의 시도와 좌절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삶의 조건을 다시 구성해 나가는 행동이 지금 이곳에 필요하다.

그 출발의 지점은 멀리 있지 않다. 모든 정치적 사안에 무관심해 보이고, 오로지 자기 영달을 좇는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이던 내 옆의 친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 속에서 느끼는 모순이라는 균열을 포착하는 것에서부터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학생들은 수많은일정들로 바쁜 생활을 보내면서도 진보적인 인사들의 강연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취업 준비나 영어 공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지침을 얻고자 하기도 하고. 사회적 기업 동아리에 들거나 기부에 많은 관심을 갖기도 한다. 또한 한시라도 자기계발을 계속하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더 열심히 자기계발 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대학 생활 4년을 보내버리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 일인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때로는 공동체의 유대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호소하기도 한다. 정치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도 읽을 수 있다. 이번 법인화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학우들은 나름대로 학내외 주요 사안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어떤 통로를 통해 정보를 얻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현 시기 학생사회는 학생회가 그런 것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상상력마저도 제한되어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고민들은 그저 파편화되고 개별화되어 해소되거나, 스누라이프 등에서 정념만 넘쳐나는 개인적인 의견을 토로되어 버리고 만다. 요컨대 자기계발과 발전주의의 강력한 흐름 속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대중들의 불만과 욕구, 진보적 지식인이 되고 싶은 열망들은 방향성 없이 그저 그때그때 표출되고 개인적인 해소로 그치고 있는 것이다.

 

2. 학생회를 둘러싼 쟁점과 전망

(1) 학생회를 둘러싼 쟁점

학생사회의 ‘전환’을 위한 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지금, ‘학생사회’가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고할 필요가 있다. 학생사회라는 말을 살용하는 것은 학생들의 특수한 위치나, 사회와는 독립적인 특수한 이해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물질성 및 이데올로기가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과 결합되는 측면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학을 학생사회라는 목적의식적 호명을 통해 분석하는 것은, 현 시기 대학인들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이에 균열을 내고, 신자유주의 교육개편으로 인한 과소교육을 극복하며, 보편적인 대중 저항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현재 ‘대학인들의 이해에 기초하여 낮은 수준에서부터 운동을 만들어간다’는 명목으로, 경제주의/실리주의에 빠져 있는 운동진영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면서, ‘전체운동’의 조건이나 과제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학생운동’ 이라는 문제의식을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학생사회 내부에서도 민주주의와 자치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건설되기 시작한 학생회는 이후 끊임없이 대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며 한국 사회에 개입해왔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이제 ‘민주화되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자리 잡으면서 정치적 입장을 적극 표명해왔던 기존 학생회의 역할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까지 이어졌고 이에 탈정치화 경향까지 겹치면서, 학우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비정치적인 기구로서 ‘복지’를 전담하는 학생회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이에 따라 선거 시기 마다 학생회의 역할이 ‘정치이어야 하나, 복지이어야 하나’라는 이분법에 갇힌 논쟁이 계속되었고, 끝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듯 ‘탈정치’, ‘복지’를 핵심 기조로 내거는 학생회가 곳곳에 세워졌다. 정치/복지 이분법 담론은 200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으나, 이러한 논쟁마저도 점차 식어가면서 대부분의 학우들은 정치에도 무관심해졌듯 그렇게 학생회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져갔다.

 

학생회 경향의 변화

그러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08년 촛불 정국, 09년 시국선언 정국, 그리고 총학생회 집행부원의 식권 위조 사태와 총학의 빠른 개입을 요구했던 법인화 쟁점이 잇따라 터지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학내 복지 사안 중심 운영 혹은 소멸로 수렴되어가던 학생회의 모습에 반전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다시 ‘학생회’의 역할이 학우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총투표를 거쳐야 하니, 말아야하니 말도 많았지만 정치활동을 안 하겠다며 당선된 학생회들까지 깃발을 들고 거리에서 학생들과 함께 달렸고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동참하며 ‘준엄한 목소리’로 시대를 타일렀던 것이다. 깃발을 들고 거리를 달리며 대표를 자임하는 학생회는 권력적이며 편협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더 많은 숫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던 그들이 학교 바깥을 향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현 시기는 오랜만에 학생회에 대한 평가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생회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가 대중들 사이에서 토론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학생회 해체론 혹은 무용론, 비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무관심 속에 고립되어 가던 학생회가 다시 대중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다.

이러한 학생회 경향의 변화에 대해 한 쪽에서는 섣부른 기대를 걸기도 했고, 한 쪽에서는 냉소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와 복지를 이분화하는 정치학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왜 학생회가 거리로 나오게 되었는지, 학우들은 왜 학생회에 이것을 요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법인화 정세를 거치면서 이미 정치가 우선이냐, 복지가 우선이냐의 쟁점은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학우들은 철저한 학내/학외 사안, 혹은 철저한 복지/정치 사안이라는 구분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2000년대 이후 전개된 복지/정치 논쟁의 구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에 내용이 없는 구도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무조건적인 입장 표명보다 의견 수렴이 당연히 중요한데, 급하면(?) 입장 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든가, 입장 표명과 의견 수렴이 반드시 분리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의견 수렴이 우선인데 그게 잘 안 되는 상황이니 잘(?) 하는 게 중요하다든가. 즉, 학생회에 대한 논쟁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긍정적일 수 있으나 그 논쟁이 건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학우들의 토론을 통해 새롭게 학생회 상이 제시되지 않은 채, 학생회는 학생회대로 이 논쟁에 추동해내지 못하고 관성에 빠진 운영을 이어간다면 그것은 다시 학생회에 대한 환멸로 수렴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일련의 정국들은 정치와 복지의 구분, 학내 사안과 학외 사안의 구분은 허구적이었으며, 학생사회 역시 남한 사회의 모순이 투영되는 공간이기에 캠퍼스 밖 사회와 학생들의 이익이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회의 변화는 학생들의 요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학생회가 해야 되는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고 학생회는 그/녀들의 이러한 요구를 수행해야만 했다. 다만 여전히도 많은 학생회들은 이러한 정치적 행위를 ‘대리’하는 것 이상으로 하지 않았는데 지속적으로 싸움을 만들어가는 것, 정치의 결실을 다시 학생사회의 공동체에 축적해 나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우들은 거리에 나섰고 지신의 입장을 개진했지만 정치의 공간은 실제로 확장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원동력은 학생사회에 지속되지 않고 논쟁과 토론은 하나의 국면이 지나자 증발되었다. 학우들의 요구만을 받아 안는 액션만을 취할 뿐 근본적이고 집단적인 정치를 외면하고 ‘한방의 시국선언과 가장 큰 촛불 집회로의 규합’ 으로 요구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연세대 총학생회의 경우를 보자. ‘학생을 향합니다, 연세 36.5+’를 걸고 ‘학생권 학생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당선된 그들은 오직 학생만을 위한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했었다. 이렇게 학생운동에 대한 선긋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이 연세대 총학생회가 지난 노무현 추모국면에 추모 촛불 집회에 참가, 추모 콘서트를 학교 안에서 개최하려다가 학교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행보는 특정 정세 안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분리시키던 ‘운동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실제 학교의 몇몇 학생들은 ‘너희가 운동권과 다른게 뭐냐, 왜 학교를 소란스럽게 만드냐’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들은 추모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은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추모 활동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정치는 정당이 관계 되었나 아닌가, 정치인이 참석 하는가, 그렇지 않나가 아니다. 이미 이것은 통속적 의미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라고 보여 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란 우리가 생각하고 발언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발언해야 하는 것은 이 정치적 콘서트의 개최를 막았던 연세대 대학 본부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비판하고 논쟁하는 것이었다. 연세대 총학생회가 추모 콘서트의 ‘비정치성’을 부각시키는 순간 오히려 연세대 학생들의 정치적 입장은 설 자리를 잃었고,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행위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한정지어야만 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정치를 허물어트린, 오히려 민주주의의 진짜 실현을 가로 막은 ‘정치적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시국선언을 한 몇몇 교수님들, 순수한 총학생회장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역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결론의 전부는 아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던 학생회, 학생사회의 해체가 촛불 집회를 겪으며 학생회의 역할에 대한 기대의 변화를 가져왔고, 정치/복지로 학생회의 역할 구분을 하던 2000년대 초중반의 프레임과는 달라졌다. 우리는 학생회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재진단 해야만 한다. 학우들이 학생회를 통한 집단적인 문제해결을 다시 호출하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자치, 연대, 저항이라는 가치를 통해 기층 공동체의 복원, 다시 말해 정치의 공간을 아래로부터 만들어내야만 한다.

 

민주/비민주, 복지/정치

학내 민주주의의 표상이며 저항, 자치, 연대를 구현한다던 학생회는 학생사회의 해체 이후 학우들에게 비민주, 심지어 소통과 논쟁의 과정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입장만을 강요하는 권력 집단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에 기여한 것은 IMF 이후 대학이 취업양성소화 되었던 시대의 흐름과 조직화된 비/반권의 움직임이 있었다. 비/반권은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 내에서 ‘탈정치’, ‘학생만을 위한’, ‘복지중심’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선동했고 이러한 정치와 복지의 이분화는 학우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어갔다. 정치적 입장을 강변하는 학생회가 아니라 제대로 된 복지서비스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진짜 학우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주적’인 학생회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과연 학생사회의 민주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학생회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치를 통한 학생권력의 획득, 만인이 정치의 주체로 서는 것, 논쟁이 기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다. 현재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최고형태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며 학생회라는 자치공동체가 만들어졌고 학생회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공간이었다. 본디 민주주의는 확장적인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특정 형태와 결합하며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만들어가는 ‘논쟁’ 그리고 그 논쟁이 생동할 수 있는 ‘공동체’가 살아있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바로 이것이 학생회, 학생사회가 지향하던 자치의 원리였다면 비/반권 학생회가 2000년대 초반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학생회가 함께해야 하는 것은 ‘일반 학우’의 이해라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업이 아니면 대표를 맡고 있는 학생회는 수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비/반권 학생회의 행보는 학생사회의 해체를 가속화 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최근 촛불이라는 국면 속에서도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거나 학생회의 정치적 입장을 대리주의에 가두는 편향은 학우들의 분노를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잠정적인 수준에서만 해결함으로써 논쟁의 조건을 허물어버렸다.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일순간 결집하는 듯 보였다가 사라지며 허물어졌다. 이러한 경험은 결국 ‘우리는 힘이 없다’는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거리가 만, 삼만, 오만, 십만의 촛불로 그 세를 불리는 동안 보였던 잠깐의 희망, 스스로의 힘에 대한 감동은 ‘그리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더 큰 패배감으로 돌아왔다. 공동체의 정치는 좀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을 유발할 수 있어야만 입장은 힘을 갖는다. 모든 의견을 존중하나 가장 보편적인 ‘일반학우’를 존중해야 한다는 애매한 정치적 다원주의의 표방은 사실 침묵보다 더 현실을 은폐했으며 정치의 공간을 파괴했다.

‘일반학우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진짜 학생회라고 소리 높였던 학생회들이 있었으나 일반학우라는 언명은 사실 정체가 없는 슬로건에 불과했다. 정치/복지의 이분법이 허구적이듯 비/일반의 학우로 나뉠 수 있다는 것 역시 허구였다. 학생회라는 것, 학생이라는 것은 ‘대학’이라는(경계 지을 수 없는) 울타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사회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의 입장으로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환상에 가깝다. 입장의 차이는 차이가 있는 부분을 채택하지 않고 발언하지 않음으로써 존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부각시키고 토론할 수 있어야만 민주주의는 그 이념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허구적인 선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딪히며 ‘입장’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진짜 민주주의다.

 

(2) 논쟁의 공간, 정치의 공간을 여는 학생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비/반권들도 그들의 정치학에 따른 입장과 계획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기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이 정치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지도,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면죄부를 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즉, 입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되 어떠한 ‘입장’을 가질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어떠한 입장과 자세로 학생회를 준비할 것인가?

많은 학생들은 정치로부터 자신을 과소 참여시키고 있으며 정치는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정규직 법안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고, 부자감세, 대운하 사업은 우리의 삶으로 깊숙이 전달된다. 등록금 문제는 우리 가정 경제 문제나 학교와의 협상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문제이며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발언되지 않으면 해결 역시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정치는 이름 있는 정치인들의 이전투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 가장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고 개입하는 문제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바라는 사회, 발언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에 녹아들어 있다. 하기에 공동체가 논의하고 논쟁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학교 주변 상점에서 할인받을 수 있는 카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을 실업자로 만들고 가난하게 만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등록금에 대해서, 재개발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다. 논쟁의 공간을 연다는 것은 하나의 결과물, 한 번의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울대 법인화 문제와 관련하여 총학생회는 총투표를 발의하고 진행했으나 적극적으로 집단적 논쟁을 만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총투표 결과 79%의 학생들이 법인화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의 학생회는 이 결과를 가지고 정치의 공간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우들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대리하며 움직이는 학생회가 아니라 대중들의 고민과 요구를 받아 안아 논쟁의 공간을 열고, 집단적으로 문제 해결의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학생회다. 논쟁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학생회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논쟁의 공간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논쟁이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역할일 것이다. 논쟁이 가능한 기층 공동체의 복원에 함께하고 지적 차이를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 중요한 사안이 더 많이 학우들에게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학생사회 안에서 학생회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현실의 침묵을 깨뜨리는 정치, 그것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3. 학생사회 재구조화를 향한 헌신, 그리고 새로운 실험!

-학생회의 표상을 다시 세워내고 자치의 원리를 구현하자!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선거라는 집중적인 정치의 장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발언하고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 무엇과 대결하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어떠한 입장과 정책으로 학생사회와 공동체의 재건을 제안할 것인지 원칙을 확인하고, 인문대의 조건에 맞는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고민해보자.

 

학교는 광장이 되어야 한다.

지난 6월, 연세대 정문은 거대한 셔틀버스로 막혔다. ‘사법고시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콘서트를 불허’한다는 학교의 입장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콘서트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성신여대에서는 모든 행사에 강의실 대여료 매기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담장없는 대학을 지향하고 대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논하던 대학은 상업적인 공간으로 스스로를 자임하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다. 이러한 학교의 계획은 대학의 상업화, 학생 공동체의 파괴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광장’이 되어야 한다. 모든 공간과 지식이 돈에 의해 점유되고 있는 시대에 노동자와 빈민에게 대학이 문을 닫는다면 연대와 대안은 더 멀어져가게 될 것이다. 평등하게 열린 공간으로서 대학을 사수하고 학내 자치와 민주주의를 바로세우는 싸움을 시작하자. 모든 기층 단위 학생회의 자치권을 보호하고 학교의 담장을 높이려는 본부의 상업적 계획을 저지하며 자치-연대-저항의 원리를 실현시키자.

 

정치의 공간으로서 과/반 공동체를 재건하자!

최근 과/반 공동체의 급속한 탈정치화와 해체는 공사분리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무언가에 의해 추동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언제부턴가 과/반은 새내기들이 선배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공간, 또는 공부하랴 자기계발하랴 바쁜 학우들이 심신이 고단할 때 잠시 재충전하러 들렀다 가는 공간으로만 사고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과/반 내에서 무리없이 통용될 수 있는 언어나 행동의 범위가 크게 제한되는 현상으로 귀결되었다. 과/반은 ‘어렵거나 심각한 얘기’, ‘나하고는 상관없는 무거운 얘기’가 어울리지 않는 곳이 되었고, 몸과 마음이 가볍게 머물다 가는 곳이니만큼 밝고 즐거운 얘기만이 존재하여야 하는 학내의 ‘사적 공간’ 처럼 되어버렸다. 이러한 경향은 과/반을 정치적 공론장으로 사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학생 공동체의 심각한 파괴를 불러오고 있다. 정치 재건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기층 공동체의 복원이 절실하다. 현재 과/반의 상황이 상이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계획도 각각 존재해야 한다. 무너져 가는, 혹은 이미 무너져 버린 과/반 공동체를 복원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자. 과/반 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해 자기통치로써의 자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과/반을 되살려내자.

 

학교발전 이데올로기와 적극적으로 대결하자!

발전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와 만나며 ‘권리’를 포기하거나 폭력을 정당화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연세대 송도캠퍼스 이전, 서울대 법인화, 중앙대와 동국대 등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학과 구조조정은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은 이것이 자신에게 ‘더 나은 교육’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안이 없다’는 것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공세적으로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있는 학교본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총운영위원회 의결, 총투표 정도의 계획으로는 부족하다. 현재 학생사회의 물질적 조건 상 이것만으로 담보할 수 있는 정치의 공간은 넓지 않기 때문이다. 총토론회, 공동행동과 같은 좀 더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기획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속적으로 쟁점을 던지고 다양한 측면에서 학우들에게 직접 함께할 수 있는 계획 속에 학교발전 이데올로기, 넓게는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자.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집단적 인식, 논쟁의 공간을 열자!

지난 430문화제 당시 건국대학교의 일부 학생회와 학우들은 ‘학교는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학교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 결과 학교 문 밖에서 문화제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학교본부가 아닌 ‘학생’들이 직접 학교의 문을 잠그고 ‘우리는 당신들을 초대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학교의 담장이 높아져가고 사회문제에 대한 ‘대학생’이라는 공동체의 집단적 인식이 부재한 지금,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 지향해야하는 가치와 인식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자. 왜 대학생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하는지, 왜 노동자 민중, 빈민들과의 연대를 고민해야 하는지, 여성의 문제가 왜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야 한다. 대학이 단지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기 전 ‘스펙’을 쌓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을 이해하고 관점과 입장을 키우며 그를 통해 논쟁할 수 있는 공간임을 학우들과 함께 실험해나가자.

 

선관위원장 (구현) : 발제 잘 들었다. 질의하실 분 있으면 손 들어 해달라.

 

좌중 침묵

 

선관위원장 (구현) : 없으면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여성주의 각론 발제 부탁드린다.

 

리바이브 선본짱 (준용) : 0. 들어가며

올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여자 연예인의 특정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신종 단어가 유행어처럼 나돌기도 하고, 끔찍한 아동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내려진 12년이라는 형량이 너무 적다며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기도 했던 일들을 들 수 있겠다. 여성들이 ‘꿀벅지’라는 단어가 성적인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성희롱이라고 제기하자 남성들은 ‘초콜릿복근’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제기하지 않는데 왜 유독 여성의 신체부위를 지칭하는 단어만 성희롱이라고 하냐며 이것은 남성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공격을 해오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도대체 무엇이 성희롱이냐’에 대한 논쟁이 인터넷 게시판을 뒤덮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한 개그 프로에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라는 이름의 코너까지 등장했다. 그동안 여성들이 성차별이라고 제기해왔기 때문에 남성들이 드러낼 수 없었던 애환(?)을 소재로 한 이 코너는 첫 방송에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회를 더 해갈수록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부각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성폭력을 차단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법제도를 더욱더 강력하게 바꿔야 한다는 지점에서만 논쟁이 형성되고 있다. 이 사회의 어떠한 구조와 인식지형이 끊임없이 성폭력이 발생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고찰이나 반성은 간데없다. 성폭력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를 선정적으로 드러내며 이런 가해자에게 12년은 너무 적으니 무기징역이나 화학적 거세 등의 외국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만 되고 있다.

이런 이슈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소위 ‘꿀벅지vs초콜릿복근 논쟁’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꿀벅지’가 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단어이고 ‘초콜릿복근’은 어떤 맥락에서 성희롱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못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제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으레 페미니스트들의 억지라고 일축했으며 페미니즘은 역시 여성들만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더욱더 단단히 굳혔다. 어쩌다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드센 여성들의 요구에 밀려 남성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당당히 외치는 개그맨들이 뜨거운 호응을 받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일까?

2010년 학생회 선거 페미니즘 각론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주체화되는 방식을 살펴보며 여성들이 불만을 느끼는 지점이 어디이고 그러한 불만들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대생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며, 하기에 지금 대학사회에 필요한 페미니즘은 무엇인지를 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만을 보장하라는 것이 아니며 남vs여의 구도를 만들어 불평등한 사회에서 여성이 더 많이 가지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번 학생회 선거를 통해 분명히 말하자. 선거에 임하는 모두가 페미니즘이 이 시대의 보편적인 해방을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권리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위하여 이 각론이 풍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시대분석_ 여성들은 어떻게 주체화되고 있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20~30대 여자들의 대부분은 ‘일하는 여자’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분야를 막론하고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고민과 속마음,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인내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여자들만의 문제,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노하우를 담은 책…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 책 소개 中

사회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직장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 이 사회가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는 것, 그렇다고 일 안하고 집에만 있다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라는 것, 내조의 여왕이 될 것인가 커리어우먼이 될 것인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병행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가 정말 불합리하다는 것 등은 거의 모든 여성들의 불만이자 여성 관련 계발서들이 서두에 담는 내용이기도 하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여자, 세상을 유혹하라"는 책에는 여성들에게 남성을 잘 유혹하는 방법, 화장법, 애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섹스 기술등이 나열되어 있다. 직장 내에서 사람들의 기분을 잘 맞춰주면서도 매력적인 여자가 될 수 있는가가 주요한 책내용이다. 책을 보면서 많은 여성들은 책에 나오는 온스타일지에서 일하는 코스모폴리탄 여성들을 동경하지만 동시에 답답함들을 가진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더이상 지금의 나로 머물러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극소수의 돈도 많고 외모도 이쁘고,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면서도 섹시한 여성은 이 사회에 몇 되지 않기 때문이다.아니, 어쩌면 여성들의 자신감의 원천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격하게 말해, 잘 팔릴 수 있는 여성이 되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버려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책들이 나에게 해방감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열심히 스펙을 쌓지만 결국 대부분의 여성들이 ‘최고의 스펙은 남성’이라는 벽 앞에 좌절한다. 결코 여성들이 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사회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뛰어난 능력자가 되라고 주문하며 여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많은 여성들이 현실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남의 시선에 자신을 짜맞추는 자기계발을 택한다는 것이다.

경기가 장기 침체로 접어들면서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경제위기를 체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자기계발은 ‘알파걸’과 ‘골드미스’가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생존 자체를 위한 조건이다. 많은 여성들은 롤모델로 제시되는 여성들의 삶이 위의 책에서 제시된 몇 안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을 계속해서 바꾸어가는 끝에 합당한 만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다시 이를 악물게 되는 것이다. 즉, 골드미스와 알파걸은 지금 이시대의 여성의 모습을 이야기해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여성의 취업률이 늘었다는 통계가 발표되고 있는데, 올 2월 대졸 여성의 59.4%가 7월까지 일자리를 구해 2007년 46.4%, 2008년 54.7%에 이어 3년째 취업률 증가세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대졸 남성의 경우 취업률이 낮아지고 있다는데, 그럼 정말 여성들이 더 취업 잘 되는 세상이 온 것일까? 주목할 것은 증가하는 퍼센티지가 아니라 일자리의 질이다. 올해 취업한 여성 대졸자 가운데 임금근로자는 15만 2000명이었는데, 이 중 상용직 취업자는 절반 남짓(7만 7000명)에 불과했다. 많은 여성들이 눈높이를 낮춰 임시·일용직으로 취업하기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취업률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계속해서 일자리의 질이 낮아지는 가운데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정부의 기조는 사회서비스시장화정책이나 경력단절여성들의 재취업을 위한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등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정부의 정책들은 성별 분업과 생계를 부양하는 일차적인 의무가 남성에게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여성 노동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사회가 바뀌어 골드미스와 알파걸들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바뀐 것처럼 보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학내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놓은 틀이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면서 페미니즘은 제도로, 여학생들의 편의만을 요구하는 이기주의라는 오해로, 대학생이라면 이미 지키고 있는 기본 에티켓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성폭력이나 성차별이라는 단어가 케케묵은 무언가를 다시 들춰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여자 대학생’은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관계 맺고 자신의 능력대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로 서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반 내에서 선배 여학우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심지어 "그 많던 여학우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책까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놀이문화에 자신이 낄 수 없어서, 재미가 없어서 과반에서 점차 멀어지는 여학우들의 목소리보다도 여성주의는 공동체를 깨뜨린다는 이야기가 사회대 학생회 선거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사회대 내에서 너무 많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실상 새터 때 사회대 모든 과반들이 반성폭력 내규를 만들고, 논의 하지만 번번히 "이중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라는 농담들이 새터 술자리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월에는 사냥꾼들이 활동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애를 하고 싶어하며 새내기 여학우들을 사냥하러 나오는 고학번 사냥꾼들이 1,2월 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3월에 본격적으로 활동한다는 전설. 물론, 이 사냥꾼들의 사랑을 순수하지 않다며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 연애의 결말 이후 연애의 대상이었던 여학우들에게 과반은 나가기 불편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만큼, 사회대는 수많은 페미니스트들 때문에 여학우들이 오히려 기가 쎈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스누라이프에서는 성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불만이 계속해서 올라오는데도, 놀랍게도 오프라인의 학교는 매우 조용하기만 하다. 작년에는 '남휴‘, ’성폭력적 교수‘ 사태 등 공론화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논쟁이 오고 갔다면, 올해는 여성과 관련된 어떠한 이슈에 대해서도 입 밖으로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직이 어려워서 힘들다는 스누라이프에 올라온 어느 여학우의 고민글(’여자=최악의 스펙‘)의 에 대해서 댓글이 많이 달렸는데, 대체적인 반응은 ’여성이 직장 취직하면 금방 관두니까 그런거 아니냐‘, ’여성은 아무리 일이 많아도 가정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한다고 하니 같이 일하고 싶겠냐‘, ’여성과 함께 일하면 불편하다‘ 등 여성에게 적대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오랜 기간 직장이 남성 커뮤니티가 강고하게 구축되어 있어 그 문화에 여성이 끼어들기 어렵다거나, 여성이 직장을 갖더라도 가정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까지 떠맡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오래 하기 어렵다는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오로지 여/남 대립 구도에서 서로를 적대하며 소모적인 감정싸움만이 오고가고 있다. 이처럼 여성 억압적인 문제에 대하여 불만이나 불쾌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불만이나 불쾌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개인의 불편함이 아니라는 것을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대학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오랜 기간 페미니즘을 학내에 환류시켜왔던 ’쥬이쌍스‘지도 끝내 폐간되었으며 단대별 여성주의 모임이 해소되어가는 경향 속에서도 굳건히 버텨왔던 사회대 여성주의자 모임 또한 올해 겨울 임시 해소에 들어갔다. 모든 공간에서 여성주의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고 반성폭력 내규를 한 번쯤 제정해본 과/반 공동체에서조차 페미니즘이 예전만큼 권위를 가지지 못하고 있으며 문제가 되는 사안도 이야기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반성폭력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전의 상황만큼이나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불편함과 답답함을 가지고 있지만, 이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어서 공동체 전체적으로 문제제기 하기는 힘든 상황, 욕을 하는 남학우에 대한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때 "까다롭고 다가가기 어려운" 여자애라는 낙인이 찍혀버리는 상황을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공동체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학우들 또한 자신의 문제를 페미니즘 문제라고 이름 붙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 공동체를 깨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선본 정책으로 나오는 상황, 페미니즘은 여성 이기주의라는 인식 하에서 나는 페미니즘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본디 페미니즘 운동이 누군가 특정집단 만의 이익을 요구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바꾸자는 이야기였고, 불편함의 원인을 지적하면서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성폭력 상황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면, 또는 여성들이 취직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비합리적으로 보일까봐 더 이상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나의 불편함들을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문제 상황은 존재한다. 여성들이 취직하기도 어렵고, 성폭력적인 상황들도 내 주위에서 벌어진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존재하지만 설명할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딜레마가 바로 지금의 공동체에서 여학우들이 떨어져나가고 있는 것의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불편함은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대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는 식으로 분출되지 못하고 있다. "남자들은 원래 그래"라면서 자신의 답답함을 해소하지만 매일 욕하면서 혼자 살 수는 없으니 적당히 괜찮은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되도록 불편한 자리는 가지 않고, 답답한 일들이 있으면 친구와 술을 먹으며 풀면 된다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아직 답답함이 해소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문제의 원인을 건드려야 하지 않을까?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여성의 불편함, 여성들이 왜 나오지 않을까 고민하는 남학우들의 고민은 어떤 한 성이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남성들에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을 강요받았던 구조가 있고, 여성들에게는 여성성을 강요받았던 구조들이 있다. 문제의 원인은 공동체에서 답답함을 느끼도록 만든 사회 구조인 것이다.

 

2. 페미니즘으로! 공동체에서 논쟁과 토론을 재개하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불만과 불안감을 설명하고 공동의 실천이 활발히 이루어지기에는 대학사회의 조건이 과거와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왔던 많은 것들이 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유의미한 고민을 던지지 못한 채 학교 당국의 제도권으로 빨려들어 가거나, 학내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여성들의 이기주의로 받아들여지는 모습, 대학의 문화가 양성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기층 공동체에서 기본적인 반성폭력 내규조차 토론되기 어려워지는 대학의 모습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을 끊어내자는 것이다. 마초들에게 상처받고 공동체를 떠나고, 취직할 때의 자신의 능력이 아닌 외모를 돌아봐야 하고, 가사노동과 커리어우먼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을 특정 여성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두지는 말자. 그리고 이 상처들은 누군가의 개념없는 짓 때문이라는 인식 또한 바꿔서 공격의 화살을 특정한 마초 몇명, 특정한 직장 상사를 향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조적인 폭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과정들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 페미니즘 운동에서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과 정치가 분리되어서 일상은 사적영역, 정치는 공적영역으로 인식하는 것을 바꾸자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역할 분담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 또는 지금 자신의 의견을 묻어두고 정치적인 의견 표출을 성공한 이후나 특정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우리 내부의 일상과 정치의 분리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학생회의 문제점, 또는 공동체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이야기할 때에도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셋째,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끊어내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가깝게는 과반 내에서 당구를 잘 못치고, 피씨방을 싫어하고, 축구를 잘 못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또는 그러한 놀이문화 만이 존재하는 것)을 바꾸어 내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더 나아가서 이성애가 가장 올바르고 정상적인 연애 관계이다/ 이주노동자는 정주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비정규직이 생긴 것은 정규직의 이기주의 때문이다/ 와 같은 분리하지 않아야 될 것들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들을 말하는 것은 제도권 내의 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지금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 한명 한명이 페미니즘의 원리를 통해 함께 논쟁을 할 수 있어야 바뀌어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터져나오는 불만들과 답답함들을 홀로 안고있지 말자. 너무도 고요하지만 속앓이 하고 있는 사회대는 지금 함께 변화를 꿈꿀 수 있는 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시금 페미니즘을 ‘공동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 페미니즘 없이는 공동체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앞에서 세 가지 논의지점을 통해 보았다. 이제 누군가 몇몇 사람들이 하는 특별한 고민이 아니라 내 자신의 불편함을 설명하는 언어로서 페미니즘을 인식하자.

 

3. 페미니즘이 집단적 저항의 언어가 되기 위하여

사회가 분명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페미니즘을 보편적인 권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운동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다시금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거기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논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고민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어떤 구성원에게 불합리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이 생겨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나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대학사회는 사회의 구조와 지배적인 문화가 투영되는 공간이기에 사회가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 안게 되며 그것은 결국 배제되는 사람들을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페미니즘을 공동체가 작동할 수 있게 만드는 연료, 즉 ‘보편적인 윤리’로 만들지 못하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고려되지 못한 채 남녀의 평등이 관념으로만 남아서 오히려 차별을 은폐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공동체에서는 권력을 가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확연히 구분되고,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억압이 될 수도 있고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성적 차이로 인해서 차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공동체(사회)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끈질긴 실천들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은 페미니즘 쟁점이 소멸된 상태가 아님을 앞에서 밝혀보았다. 여성이 취업할 때도, 사회대라는 공간 안에서도 수많은 유리 장벽들을 마주치고 있다. 하지만 예전 반성폭력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와 다른 점은 이제 그 쟁점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는 공간, 유리 장벽의 원인을 밝혀 줄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으로 공동체를 복원한다는 것은 지금 부족한 이 공간들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성주의 자치언론도, 각 과반에서 2명씩 여성주체가 모여서 사회대 내에 논쟁지점들을 던지던 사연이라는 공간도 소멸한 지금의 상태. 그렇다면 학생회 자체가 이것을 추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저번에 있던 단학 대회에서 현장 활동이나 여타 운동들을 할 때 반성폭력 내규도 항상 하고 있고,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들도 병행하기 때문에 지금의 학생회는 페미니즘 운동을 계속적으로 해나가는 중이다는 말이 나왔다. 모든 현장 활동이나 운동에 있어서 페미니즘을 녹여낸다는 문제의식은 중요하고, 건강한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논쟁이 촉발될 수 있는 모든 공간이 소멸된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이상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로는 사회대 내 페미니즘을 복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사회대 내의 페미니즘을 복원하는 것은 바로 페미니즘의 “집단적” 저항을 복원하자는 의미이다. 그러나 집단적 저항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해서 페미니즘이 집단적 저항의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꿀벅지”에 대한 논쟁이나, 성폭력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사회대 학생회에만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과반 내, 동아리 내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즉 기초서부터 다시 시작할 때이다. 그럼, 어떻게 이를 복원할 것인가? 페미니즘은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윤리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동체 내에서 “페미니즘적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 변혁인 것이다. 그리고 개인개인이 바뀔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모든 것은 아니나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기 변혁을 이야기하고 자기 해방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집단적 저항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자기 변혁과 해방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공간을 복원해내는 것이 페미니즘이 집단적 저항의 언어가 되는 첫번째 발걸음이다. 이러한 원리로 대학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한데 이제는 학생회가 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 반성폭력 운동의 목표를 재설정하자: 공동체에서 논쟁을 다시 시작하자!

그간 대학 페미니즘은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는 성정치 담론과 반성폭력 운동의 실천으로 대학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며 발전해왔다.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던 성폭력의 문제를 대학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학내 구성원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 왔던 페미니스트들의 전성기는 학생운동이 수세기에 접어들면서 함께 소멸되어갔다.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반성폭력 규약/학칙은 그 자체만으로 성과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떤 것들을 담으려고 하는지를 설득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구성원들의 기존 사고방식을 깰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과인 것이다. 그런 고민들이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대학사회에 제시해 왔던 담론과 정책들-예를 들어 반성폭력 학칙이나 여학생 휴게실 등-이 이제 더 이상 대학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단지 학칙이나 제도로서 금지주의적이고 처벌주의적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이다.

지금 대학사회에서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논쟁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과거 대학사회에서 사람들이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성폭력이라고 이름 붙이는 과정은 얼마나 충격적이고 논쟁적이었겠는가. 하지만 지금 사회대 내에서 페미니즘은, 이미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 되면서 더이상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지 못하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 페미니즘을 반성폭력 내규를 잘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금 사회대 내의 페미니즘 담론 때문이기도 하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잘 처리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것 자체가 운동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은 단지 성폭력 사건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사건을 잘 해결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동체의 어떠한 인식구조가 성폭력을 발생시키는지 분석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학습과 논쟁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페미니즘은 자기 변혁의 과정이다.

성폭력적 상황을 없애는 것은 성폭력을 예방하는 교육들을 잘 한다고 가능하지 않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은 다른 사람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자체이다. 그렇기에 조금더 자유로운 공동체는 구성원 한명한명이 바뀌면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고 외친다고해서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내에서 어떤 이야기, 어떤 놀이, 어떤 문화가 존재하는가 에서부터 공동체를 돌아보자. 심지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여성이나 특정한 한 사람에게 가사노동이나 감정노동을 전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은 아직도 "마초"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세미나를 절대화 시키지 말자. 열심히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고, 3.8 여성의 날 행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 공동체가 페미니즘적으로 재구성되지 않음을 여러 날 동안 보아왔다. 서로가 변할 수 있고, 공동체가 바뀔 수 있는 더 많은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에서 논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사회 변혁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프랑스 시민 혁명이후 거리에 나와 정치를 하던 여성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결과를 낳았고,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는 새로운 사랑의 형태나 가족의 형태가 아닌 아메리카 핵가족으로 수렴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는 이러한 이야기가 결국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관계맺음이 혁명이후에 자연적으로 바뀌는 것이라는 담론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반성폭력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이 다른 운동에 비해 부차화되고 자기변혁을 할 수 있는 "깊은 곳을 찌르는" 논쟁들이 더이상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들로 사회대 내의 죽어버린 반성폭력 운동을 다시 진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학우들 개개인의 경험에서부터 이야기가 출발되어야 한다. 당신의 남성성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대학 내에서 "팜므파탈"이라고 불리우는 여성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과연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관계 맺음에 다른 점은 있는지도 좋은 이야기 소재이다. 상대가 강한 스트레이트라면 이성애자라는 성 정체성을 상대화시킴으로서 벽장 비우기를 시도할 수도 있다. 또, 커밍아웃하지 않고도 성 소수자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연극이나 다큐, 익명/필명 자보나 글들도 필요하다. 실질적으로 어떤 논쟁거리들이 있을지를 찾아보는 과정자체가 필요한 시기이다.

또한 더불어 필요한 것은 이 소소한 이야기들을 명쾌하게 분석해내어 어떻게 집단적인 저항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다. 연애이야기를 꺼낸다면 배타적인 연애가 어떻게 가족 내의 성별분업으로 이어지는지, 또는 지금의 여성의 위기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관점을 견지해야한다. 이성애중심주의에 균열을 내려한다면 어떻게 성 소수자 운동이 전체적인 페미니즘 운동/ 사회운동과 만날 수 있을지를 이론적으로 밝혀내는 과정도 중요하다.

 

3-2. 노동권을 페미니즘의 원리로 재구성하자

우리는 현재 여성들의 불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에게서 노동권을 박탈하고, 여성에게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의 박탈이 성별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은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여성을 착취하는 성별 분업과 가족 이데올로기의 도움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대학사회 안에서 밝혀가자는 것이다.

예전에 기륭 전자에서 있었던 조사서에서, 나이대에 따라서 여성 노동자의 계약기간이 달라지는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결혼 정년기인데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의 계약기간은 1년, 결혼은 했는데 애가 없는 여성의 경우 계약기간은 뚝 떨어져 6개월이 되었다. 이처럼 여성은 당연히 집에서 애를 보아야 하고, 결혼하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회적인 시선에 따라 자유로이 원하는 일을 하고 직장을 가질 권리마저도 빼앗겨 버렸다. 시대인식에서 보았듯이 여성 노동권의 문제는 크게 여성 노동력은 대다수가 불안정노동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여성은 일을 하면서도 가사노동을 해야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자본은 저하되는 이윤율을 해결하기 위하여 임금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쉽게 적은 비용으로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여성 노동력이다. 또, 여성이 가사도 잘하고 일도 해서 돈을 잘 벌어오면 좋다는 이데올로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이제 자본은 노동자의 재생산까지도 무료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기에 여성은 더욱 착취의 칼날을 여러군데에서 받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서 대학사회 내에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는 대학 간, 계급 간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면서 여성이라는 자체만으로 동일성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성공한 여성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비정규직이 될까봐 두려운 것보다도 더 강한 공간이다. 물론 피디가 되고 싶어도 여성은 피디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라는 말, 고시를 치더라도 결혼 이후에는 관두어야 하지 않을까, 또는 육아와 양립하기 좋은 행정직을 찾는 상황은 아무리 서울대 여자라도 느끼는 것이다. 듀오에 가면 서울대 여성은 가장 최하위의 점수를 받는다는 괴담도 존재하는 이 시기에, A급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은 불안정 노동을 하는 여성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불안감을 겪고 있다. 하지만 여성 노동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대 여성들의 권익만을 열심히 지키자는 말은 아니다. 야만의 시대에 노예노동이라고도 불리우는 불안정 노동에 대해 반격을 가하자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알파걸이 되기 쉬운 여성들이 편가르기를 하도록 지금의 언론과 사회에서 이야기를 하고있다. 하지만 알파걸이 되기 슆다고 해서 모두다 알파걸이 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지 않는가. 알파걸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것들을 느끼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시대에 나와 다른 누군가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으로서 여성 노동권을 제기해야 한다. 시대의 보편적 권리로서 노동권을 제기하고,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그것이 여성들에게 차별이 되어 돌아오는 이유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제기하는 것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주체화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집단적 저항을 위한 여성들의 무기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개별적인 불만 표출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페미니즘으로 재구조화하고 공동의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선관위원장 (구현) : 잘 들었다. 질의하실 것 있는 학우분은 손을 들어달라

 

사회대 06 상일 :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을 근절하고 일상 정치와의 결합, 학생회가 페미니즘적 저항 공간 복원, 여성의 노동권 차별화하고 배제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만들어나간다고 하셨다. 페미니즘도 그 갈래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의 부활, 노동권 관련 등의 활동에 서로 괴리가 있지 않나? 어떻게 해갈 생각인가.

 

지윤 : 다양한 상황으로 나타남. 신자유주의 시기 노동에 관한 것도 차별과 착취만으로 할 수 없음. 그간의 여성주의가 일상적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을 놓았는데 그런 걸 복원함으로써 운동으로서의 여성주의를 만들어가겠다는 의도이다

 

구현 : 앞서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 질의는 3분 내로, 답변은 5분 내로 부탁드린다. 다음 질의 있나? 없으면 다음 노동 각론 발제 부탁드린다.

 

준용 : 0. 일하지 못하는 자 먹지도 마라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자유롭고자 태어났다. 자유는 인간의 정신이자 존재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사실인가? 당장 관악 사회대를 돌아보기만 해도 과연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인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수많은 이들이 대학 입시와 경쟁 승리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학교와 학원의 기계적인 시간표에 자신의 생활리듬을 적응시킨다. 어렵사리 입학한 대학에서도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선점하기 위한 학점경쟁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학과 진입 이후에도 더욱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한 처절한 사투가 진행된다. 그렇게 힘겹게 일자리를 쟁취하지만, 취업은 끝이 아니다. 어지간히 벌어서는 자기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는 시대, 자기계발이라는 미명 하에 또다른 사다리 오르기가 시작된다. 자칫 한 발만 미끄러져도 자신의 삶과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자유'는 존재할 자리가 없다. 유일하게 남은 자유란 마음껏 경쟁할 자유뿐이다. 남을 딛고 올라서거나, 남에게 디뎌져 밑에 깔려있거나의 잔혹한 선택만이 대다수 인민의 것으로 남겨져 있다.

이른바 경제위기 시기, 이같은 선택은 더욱 강요된다. 한껏 부풀어올랐던 금융 거품이 꺼지며,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 구조조정과 조직 슬림화를 선택했다. 절대 몰락할 것 같지 않던 골드만삭스와 같은 거대 금융 기업의 투자전문가들이 하루아침에 보따리를 싸들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미국 로펌에 다니던 변호사들이 갑자기 해고당하고, 우리나라 의사들도 응급실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하기 빠듯하다 한다. 소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이런 상황임에야,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상황은 말 할 나위도 없다. 대한통운 화물노동자 투쟁,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점거파업투쟁, 금호타이어 투쟁, 비정규악법 최저 임금법 투쟁에 천일을 넘기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기륭금속 투쟁까지.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을,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더욱 강경한 싸움의 장으로 내몰린다. 일자리를 위한 싸움은 이미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하루하루 비굴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실업노동자들은 경제위기를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애당초 기업이 일자리를 줄 생각도 하지 않는 장애인들, 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취업가능한 직장을 찾기 어려운 여성들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먼 곳에서 먹고살겠다고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뺐는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박해당하고 착취당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노동의 의자빼기 게임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일자리'라는 의자는 자꾸만 줄어드는데, 이 의자에 앉으려는 또 앉아야하는 사람은 늘어난다. 외모든 스펙이든, 학연이든 지연이든간에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 의자에 앉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사회일지니.

이와 같은 모습들은, 경제위기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모든 개인이 원하는 것이 자유가 아님을 보여준다. 모든 개인이 원하는 것. 그것은 노동, 정확히는 임금 노동이다. 기나긴 역사의 흐름 끝에 민중이 목도한 것은, 자유의 사회가 아닌 임금 노동의 사회였다.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는 극히 정당하며, 거의 무한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더 이상 공동체나 복지가 아닌 '화폐'이다. 이 화폐를 가지고 있는 주체가 기업이고 또 자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기업과 자본의 요구에 응해야만 하며, 결과적으로 직.간접적으로 노동할 수밖에 없다.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노동력의 수탈을 통해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받던 옛 귀족들에게 가해진 예수의 준엄한 꾸짖음은, 오늘날의 기업들에게서 다음과 같이 바뀐다. '일할 자격이 없는 자, 일하지 못하는 자, 우리에게 대항하는 자는 먹지도 마라!'

인기있는 영화시리즈인 007시리즈를 보면, 살인면허를 가지고 있는 공작원 제임스 본드가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기업이다. '임금'이라는 무기는 제임스 본드의 권총 한 자루와는 비견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경제위기 시기, '기업이 살기위해 사람이 죽어야한다'는 명제는 공공연하지 않을 뿐 이미 사회의 불문율이 되어가고 있다. 주류 경제학이, 주류 매스컴이, 한 나라의 정부가 기업숭배의 교리를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이 노동 혹은 '생산'이라 부를만한 것을 통제하게 된 것은 그렇게 당연한 일도, 오래된 일도 아니다. 기업들은 생산의 이윤은 땡전 한 푼까지 철저히 챙기면서도, 정작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민중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다면 그/녀들의 소비를 이끌어내 지불한 임금을 다시 회수하기 위한 목적에서의 관심이 전부다. 어째서 노동자민중은 자신들이 생산해낸 밥을, 집을, 옷을 자신들이 향유할 수 없는가. 밥도 집도 옷도 남아도는데, 왜 어디선가 사람은 굶어죽고 헐벗어죽어야 하는가. 정작 그 밥과 집과 옷을 팔아 이익을 챙긴 자들의 거대한 '도박'이 만들어낸 금융위기를, 어떤 이유에서 노동자민중의 삶으로 보상해야만 하는가.

경제위기를 만든 자들이 '경제'를 만드는 자들을 탄압하는 것. 그것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참정권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허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누가 기업과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가. 기업은 투표하지 않으며 투표받지 않을 뿐, 사실상 임금 노동의 통제를 통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기업과 기업우선의 사회는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들을 가치없는 것으로 매도하며, 민중의 삶 속에 이주.정주와 같은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조장하고 있다. 보편적인 권리들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이라는 공간을 취업 양성소로, 부설 연구소로 변화시키고 있다. 노동은 내일 이야기 해야 한다거나,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단어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혹은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모두가 반드시 이야기해야만 하는 주제이다. 노동권은, 아니 생존권은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노동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대안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1. 누구의 경제위기인가?

1.1. 경제위기 그리고 궁핍화

정확히 80년 전인 1929년 10월 28일 월요일 아침, 증권시장이 붕괴했다. 이 붕괴로 인해 1932년 7월의 다우지수는 1929년 최고점일 당시의 10% 수준까지 떨어진다. 대공황의 시작을 알린 이른바 '블랙 먼데이'다. 블랙 먼데이는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22.6%라는 기록적인 다우지수 하락과 함께 되돌아왔고, 자신을 잊었냐는 듯 2008년 9월 29일 월요일에는 -777 잭팟 포인트를 기록하며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경제위기를 알렸다. 이 세 번의 경제위기는 모두 증권시장의 붕괴가 방아쇠가 되었다는 점과 함께 그 누구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해내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회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희생이 뒤따랐다는 점 역시.

2008년 9월 시작된 금융위기의 원인은 부동산과 연계된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자본의 무분별한 투자였다. 2002년 이후 뉴욕증시는 장기 호황 국면에 접어들고, 부시 정부가 저금리 기조를 택하며 본격적으로 증권 시장에 자금이 몰리기 만들었으며,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가격도 치솟았다. 이 과정에서 증권값은 실제 자산의 가치와는 관련 없는 수준까지 치솟았으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더욱 비싼 가격에 거래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부동산 시장에서의 과도한 유동성의 유통은 물가상승 압박을 낳았고, 이를 조절하기 위해 미 정부가 금리를 올리면서 2006년 12월을 기점으로 주택의 가격은 하향세로 돌아섰다. 매물이 없을 정도로 호황이던 부동산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그러나 금융권은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과거의 관행대로 레버리지를 통한 투자를 일삼았다.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이용하던 저소득층이 더 이상 금리상환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르게 된 것이 도화선이 되었고, 책임질 이 없는 금융시장은 무너져내렸다. 애초에 단일한 자산을 잘개 쪼개 판매한다는 개념 자체가, 구매자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들며 자산이 적절한 가치에서 거래되지 못하게 만드는 허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에 더해 수많은 투자회사들은 주택 담보로 채권을 만들고, 그 채권으로 다시 증권을 발행하는 식으로 '빚으로 담보를 만들고, 담보로 빚을 만드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렇듯 금융시장과 파생금융상품은 이미 그 한계를 내재하고 있었지만 금융자본은 이를 애써 무시했고 결국은 파국을 맞았다. 그 결과로 수많은 투자회사들이 파산했으며, 미국 정부가 투자회사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포기함에 따라 뉴욕증권시장에서 하루 사이에 1조 2000억 달러가 증발하고 말았다. 세계 곳곳에 영향을 끼치던 거대자본들이 붕괴함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자본의 증발은 금융시장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생산영역에도 큰 여파를 끼치고 있다.

문제는 현재의 경제체제가 말 그대로 금융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 증권시장의 붕괴와 이로 인한 주가의 하락은, 단지 몇몇 금융투자회사의 파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듯, 현재 대부분의 거대자본은 증권화되어 존재한다. 과거의 산업자본주의 시대와는 달리,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기업의 자본증식은 더 이상 생산 영역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자본은 생산과 판매를 통한 이윤보다, 금융시장에서의 자본 매매를 통해 증식한다. 현재 거대자본에 대한 가치 평가는 온전히 금융시장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금융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높은 가격에 자신을 판매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이 증식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이다. 금융시장에서의 평가는 당장의 기업 운영실태가 아닌, 미래의 자본증식 정도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이 증식된만큼 투자자가 지분을 받아가는 것이 금융시장의 운영방식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미래 가치가 중요해진 이상, 기업은 생산영역에서 최대의 이익을 내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쟁자보다 더 높은 가치 평가를 받는 것이며, 생산영역에서의 이익은 직접적인 자본 증식이 아닌 금융시장에서의 좋은 가치평가를 위한 담보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세계수준의 경쟁과 과학기술의 고도화 때문에 저하된 이윤율로 인해, 생산 영역에서 더 이상 충분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근본적인 자본의 한계 때문이다.

자본이 금융시장과 이렇게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 할 때, 금융투자회사들의 부실로 인한 주가 폭락은 곧장 기타 거대자본들의 가치평가저하로 이어지며, 이는 자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과정에 동반할 수밖에 없는 ‘궁핍화’라는 현상이다. 자본을 증식시키지 못하는 기업은 몰락할 수밖에 없는데,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경제위기는 사회 전체적인 일자리를 줄여놓았다. 자연스레 노동자들의 선택권은 축소된다. 말 그대로 기업이 죽으면 내가 죽고, 기업이 살면 내가 살 수 있다. 기업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라는 식으로 고용조건을 악화시켜도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통제권은 자본에게 있지 노동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껏 인력을 구조조정 할 수 있는 상황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남한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본격화 된 IMF 외환위기 시기 무수히 이루어진 구조조정은, M&A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조건이었다. 경제적인 불안정성의 확대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세계 자본주의의 조건이라고 했을 때, 가장 가시적인 수익 창출처는 바로 인력 비용 절감이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도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비경제활동인구가 1632만 3000명에 달해,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체 인구의 40%에 육박하는 비율이다. 구조조정을 통한 실업자 양산 뿐만 아니라, 기존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또한 거세게 행해지고 있다. IMF 시기 구조조정과 더불어 강하게 추진되었던 것은 바로 노동법의 개정이었다. 정리해고라는 말이 그 이전에는 ‘불법’이었다는 것, 지금은 너무나 흔한 원청-하청의 체계나 인력 파견 업체 구성 역시 ‘불법’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러한 사례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경제위기를 해결하겠다는 자본과 국가의 시도는 언제나 노동자민중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다.

특히 구조조정과 그로 인한 궁핍화의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여성이다. 남녀소득분배비율이 2008년 이후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모습은 구조조정 시기에 누가 가장 먼저 해고당하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유연화 과정의 일환인 비정규직화 역시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성과 남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조금도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저렴하기에 더욱 낮게 평가되는 여성 노동은 더욱 심하게 착취당한다. 일자리를 얻기 힘들어진 여성들은 단지 노동 착취가 아닌 성착취의 영역까지 밀려난다. 경제위기 시기임에도 최근 대학가 근처에 급증한 유사성매매업소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각종 언론에서 심심찮게 보도하듯, 대학생을 포함해 다양한 영역의 수많은 여성들이 생계비의 마련을 위해 성노동자가 되고 있다. 경제위기가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기존의 가부장적 구조와 결합하여, 여성들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최근들어 경제가 “자유 낙하를 멈췄다”는 몇몇 경제 관료들의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금리가 큰 폭으로 떨어지며 금융시장 안정화를 예고하고 있고,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주택시장 상황 역시 주택 판매 증가율과 집값 상승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하며 낙관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금융위기가 진정되더라도 경기침체가 종료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금융위기 과정에서, 지난 6월 9.5%로 26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던 미국의 실업률이 내년에는 11%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된다. 유효수요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사정 악화는 수출위주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남한 사회에도 즉각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잘 파악하고 있는 남한사회의 거대자본들은 장기적 생산 감소에 대비하기 위한 사업 축소와 유동성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인데, 거대자본의 수출이 전체 국민소득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구조조정 진행은 한동안 끝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1.2. 경제위기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그 한계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의 행보는 처음부터 기업살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자본과 정부는 경제위기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며 노·사·민·정 합의를 강조했지만, 결코 힘관계에서 대등할 수 없는 자본과 노동자민중의 ‘합의’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자본과 노동자민중의 입장이 극과 극이라는 사실은, 쌍용차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반대해 벌인 처절한 싸움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정부는 생존을 위해 싸우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기적인 것으로 매도하였으며,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을 '폭력집단'으로 묘사하며 철저히 고립시키고 탄압했다. 한편으로는 최저임금 수준이 너무 높으면 고용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어불성설을 늘어놓으며 최저임금 삭감을 시도하였으며, 비정규보호법의 시행이 오히려 더 많은 실업자를 만들어내는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100만 실업대란설'을 유포하여 비정규직을 더욱 쉽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게 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처럼 이명박 정권과 자본은 경제위기 이전부터 생존의 한계선에서 고통받아온 노동자민중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했다. 최저임금을 깎아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거짓말과, 비정규직이라도 좀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것이 어디냐는 기만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희생을 강요했다. 기업 위주의 대안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으로 호도하며, 정작 경제위기를 책임져야 할 자본에게는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위기의 시발점이 된 금융을 통제하기는커녕, 금융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시장통합법과 금산분리 완화를 시행하였다. 이는 금융자본의 이동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주어 경제의 불안정성을 확대할 것이며, 이로 인해 발생할 ‘추가비용’은 또다시 노동자민중이 전담하게 될 것이 뻔하다.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미명 하에, 이명박 정권은 노동자민중의 피로 자본을 먹여살리겠다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시도는 분명 자본을 위한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자본의 가장 빠른 성장이 노동자민중에게 돌아갈 파이를 키울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파이가 노동자민중에게 역사적으로 돌아온 적이 있는가? 이명박 정권을 믿는 행위 자체도 어리석거니와, 역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을 위한 사회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비록 경제위기가 실재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경제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더라도, 그 피해는 노동자민중에게 귀속되는 것이 지금의 사회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분명, 경제위기를 빌미로 계속되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공격에 저항하는 것이다. 2008년 도심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이나, 2009년 두 전 대통령의 사망이 계기가 된 추모 정세는 분명 이명박 정권과 자본의 공세를 막아내는 발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리에 쏟아져 나온 대중은 철저한 공사분리 이데올로기와 정치와 경제의 분리 속에서, 노동과 민주주의 문제를 결합하여 발화해내지 못했다. 노동권과 생존권을 포함한 인간의 제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역행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감은 그/녀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구호로서 명확하게 표출되지 못했던 것이다.

쌍용자동차 투쟁에서도 현시기 대중 정치의 이러한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자동차 산업은 경쟁적으로 설비투자를 늘려가며, 금융투기에도 동참해 왔다. 그런데 설비확장에 투자된 자본회수가 늦어지면서 자동차산업의 수익성이 하락하였고, 전세계적인 경제침체와 함께 자동차 산업도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쌍용차의 파산위기 역시 이러한 맥락에 이어져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 쌍용차 사측이 선택한 카드는, 과도한 인건비와 강성노조 때문에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2646명을 정리해고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쌍용차 사태의 책임은, 투기에만 집중한 채 기업 경영을 소홀히 한 쌍용차 자본에 있었다. 쌍용자동차는 IMF 외환위기 당시 상하이자동차에 매각이 되었고, 상하이자동차는 인수비용을 제외하고는 한 푼도 투자하지 않은 채 기술 유출과 구조조정에만 전념해왔다. 이번의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자금 유동성이 악화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미 핵심 기술을 대부분 이전한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의 정상운영을 위해 자금을 투입하는 것 대신에 법정관리신청을 택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애초에 쌍용차가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될 당시부터, 상하이자동차의 이러한 '먹튀' 행위를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쌍용차에 파산위기가 닥치자 노조 자금 출연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쌍용차를 살리려 한 것 또한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쌍용차의 진정한 주인인 그/녀들에게 돌아온 것은, 1997년에 이은 또다른 정리해고일 뿐이었다. 이런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은 77일간의 목숨을 건 파업으로 이어졌으나, 이명박 정권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경 진압했다.

비록 결과는 패배로 끝났으나, 쌍용차 투쟁은 초국적자본과 정부의 책임을 명시적으로 제기하였다는 의의를 가졌다. 해외자본의 실체를 고발해냈으며, 구조조정으로 인한 정리해고가 노동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임을 직접 보여주었다. 최근의 노동자 투쟁 중에서는 가장 우호적인 여론을 얻어냈으며, 이명박 정권이 결코 서민을 위한 정부가 아님을 폭로하였다. 하지만 우호적인 여론이 곧장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며, 전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의 폭력성과 생존권의 중요성을 이슈화시키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상당부분 고립된 채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사회적으로 지지받지 못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미온적인 태도 역시 그/녀들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고립의 결과는 투쟁 이후 쌍용차 문제 해결 방식에 악영향을 끼쳤다. 정부의 안대로 정리해고 이후 공적자금이 지원되었으며, 공적자금 역시 기업회생이나 고용과는 관련 없이 정리해고자 퇴직금 등으로 사용되고 만 것이다. 또한 정리해고의 문제가 쌍용차만의 문제로 인식되면서, 쌍용이라는 기업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피상적인 사고가 주류적인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쌍용차 투쟁의 이와 같은 결말은 이명박 정권과 자본에게 구조조정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경제위기 시기 자본의 방식대로 노동 문제를 해결하는 또다른 전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이후 상황을 염려하게 한다.

 

2. 경제위기에 휩쓸린 대학사회

구조조정과 그로 인한 궁핍화의 전개는 대학인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학점이나 학과와는 상관없이 명문대 졸업장만 가지고 있으면 취업이 보장되던 과거와는 달리,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대학은 일종의 ‘취업 학원’으로 변화했다. 대학인들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 토익점수관리, 경력관리와 같이 길고 긴 스펙관리에 들어간다. 관악 사회대 역시 이와 같은 사회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재 많은 사회대 학우들의 최대 관심사는 학과 공부라기보다는 취업과 각종 고시이다. 1997년 IMF 경제위기 전후부터 장기적으로 대학생의 취업 선호 경향은 존재해왔지만, 최근의 고시 열풍은 과거의 취업 선호 현상과도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과거 대기업 취헙 선호가 대학생들이 안정된 고소득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 지금의 고시 열풍은 경제위기가 더욱 심해지고 직장 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학생들이 고소득마저도 포기하고 안정에 집중하게 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안정성 위주의 선택은 이명박 대통령의 말처럼 대학생들이 진취적이지 못하고 보수적이며 안정지향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현 사회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민들이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나앉게 된다. 애당초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만큼 임금을 지급하는 직종 역시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고소득 직종의 경우 경쟁이 심하고 근속연수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후 사회진출을 고민해야 하는 대학생들은 이러한 노동의 실태를 이명박 대통령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이는 자연히 그/녀들이 과거와 같은 고소득직종이나 명예직종이 아닌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있다. 불안정노동의 시대가 고시 열풍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시 열풍에서도 볼 수 있듯, 경제위기가 만들어낸 청년 실업의 현실은 점점 대학 사회를 잠식해나가고 있다. 남한 사회에서 청년 실업의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의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은 일자리의 개수 자체를 제한했으며, 새로운 노동 인구가 노동시장 내로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아 왔다. 그 와중에 터진 경제위기는 그나마도 제한되었던 일자리를, 구조조정을 통해 아예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새롭게 노동시장에 나온 대학생들이 취직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실업률 통계를 살펴보면, 청년실업률(15~29세)은 8.4%로 전체실업률인 3.9%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유사 실업자를 포함할 경우 체감 청년실업률은 20%까지 치솟는다.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청년실업이 곳곳의 드라마, 개그프로의 소재로 사용될 만큼 전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실업에 대한 공포가 대학인들에게 내면화되는 것,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끊임없는 경쟁은 대학생들이 더 이상 '노동의 사회', '기업통제의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념의 사회가 끝났다는 말은, 대학생들이 더 이상 정치적 지향과는 상관없이 취업경쟁과 만연한 실업에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제위기의 심화와 더불어 실업의 문제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상황은 일차적으로는 대학생들의 문제이지만, 정부와 자본에게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오로지 경제 성장이라는 명분 하나로 자신의 정당성을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는 정부와 자본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업률을 낮추는 시늉이라도 해야한다. 이를 위해 이명박 정권은 금융산업 개발과 녹색 성장 등 이전 정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정책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정책들의 결과는 결코 청년실업문제의 해결로 귀결될 수 없다. 금융산업에 집중하다 국가적 부도 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의 사례는 금융산업과 같이 불안정한 영역에 집중하는 것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금융은 절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영역이 아니다. 금융시장은 권력-자본의 평가와 기대심리에 따라 움직이는 극히 유동적인 시장이며, 민중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생산해낸다거나 교환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금융산업이 갖는 일자리 창출 효과 역시 타 부문에 비해 극히 미미하다. 게다가 최근의 경제위기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실물자본에까지 옮겨가 기존의 산업구조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주된 원인이 금융시장의 불안정임을 떠올려 볼 때, 금융으로 청년실업을 돌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녹색 떡칠'이라 비하되는 녹색 성장 역시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 허황되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은 아무리 잘 봐줘도 허울만 지속 가능한 성장이며 친환경적 산업 발전일 뿐, 정작 현실은 투기 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부동산 개발에 머물고 있다. 건설 산업이 이미 과포화인 상태에서, 창출되는 일자리는 저소득 단순 노동이 대부분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당분간 청년 실업, 특히 고학력 청년 실업의 문제는 해결될 가망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처럼 청년실업의 문제가 도저히 개선될 가망을 보이지 않자, 이명박 정권은 청년인턴제나 잡 셰어링을 통해 대졸초임을 깎고 신규인력을 창출하려는 미봉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금의 청년실업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와 수출 위주의 경제구조, 금융 부문의 타 산업 부문 잠식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구조 자체의 문제이다. 여기에 주기적으로 경제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불투명성이 더해져, 청년실업은 더 이상 단일 국가 차원의 몇몇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정부와 주요 매스컴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수요와 공급의 논리를 따져볼 때, 경제위기 시기 심각하게 파괴되어버린 노동력의 수요가 공급을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은 오로지 일자리의 제공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정부 경제 관료들이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며 더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처럼 선전했음에도, 올 해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아이러니한 사실은 청년실업이 단순히 주기적인 경제 파동과 연관된 것만은 아님을 잘 드러낸다. 미래의 불안정성에 대한 염려와 이윤율 저하 등의 경제 구조적인 문제들로 인해 기업이 결코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이처럼 경제위기와 청년실업은 본질적으로 사회 경제 구조 자체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인들 역시 이러한 현실에 무지한 것만은 아니다. 대학인들은 그/녀들이 겪고 있는 무한경쟁과 취업전쟁이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 여부가 일자리에 기업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그/녀들은 이와 같은 구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계발과 스펙쌓기, 고시 준비를 통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안적인 사회에 대한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현실은 대학인들이 괴로움 속에서도 순응을 선택해야하는 또다른 조건이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학인들이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은 주로 개별적인 공간들을 통한 것이었다. 블로그나 포털 게시판과 같은 인터넷 공간들은 이명박 정권과 현 사회 구조를 규탄하는 글들로 매일같이 도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적인 정치의 공간인 '광장'은 잠잠하다. 그 누구도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지는 않는다. 기업이 대학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시기, 대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녀들의 생존을 보장하지도, 미래를 보장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자기통치, 정치 참여를 두고 민주주의라 부른다 할 때, 대학인들은 생존을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대학인들이 집단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문제되는 것은, 경제위기 시기 청년실업이라는 현실 속에서 그/녀들이 지배계급이 현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들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멀쩡히 돌아가던 공장이 구조조정이라는 미명 하에 하루 아침에 멈추고, 분명히 존재하던 재화가 수치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경제위기 자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이다. 생산설비도 원자재도 여유노동력도 있다면, 노동자민중 자신에게 필요한 재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경제위기가 만들어낸 일자리 경쟁이라는 허상은 대학인들을 포함한 노동자민중이 서로를 생존을 위해 싸워야하는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대학인들이 쌍용차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투쟁을 청년실업과 연계된 문제로 파악하고 연대하지 못하면서, 노사가 벌이는 극단적 폭력에만 반대하거나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거부감을 표하는 모습은 이를 잘 드러낸다. 기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대졸초임삭감에 찬성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역시, 서로를 일자리를 두고 싸우는 적으로 파악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가치를 '경제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경제위기 시기 극명히 드러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경제적인 가치를 최우선시 하는 오류는, 인간 행위의 동기를 '굶주림'과 '이윤'의 두가지로 양분화한다. 궁핍화의 경향이 직접적으로 목도되는 사회에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경제 중심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확장되면서, 더 좋은 직업 혹은 더 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행위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대학 사회에서 학년이 높아지는데도 고시 준비를 하지 않고 취업 준비를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드러낸다. 대학인들의 고시 준비는 단지 안정된 직장 뿐만 아니라, 남들처럼 고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배제되는 현실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경제 중심 이데올로기가 대학 사회를 잠식한 이후, 더 이상 '민주주의'나 '보편적 권리'를 지향하는 삶은 존경할만한 삶일지는 몰라도, 선택하고 싶은 삶은 아니게 되었다.

비록 대학인들이 민주주의와 보편적 권리를 지향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이를 중요한 가치들로 평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최근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민주주의라는 담론 하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실은 아직 사회 구조의 문제에 저항할 수 있는 불씨들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집합적으로 발화되며, 실질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학인들이 희망과 대안을 발견할 수 있는 정치적 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녀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온라인에서 개별적으로만 발화되던 것을 멈추고 광장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경제위기 시기 무한경쟁과 경제 중심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대학사회에서, 개인의 보편적 권리 추구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작이 무엇보다 노동 문제가 발화 가능한 집단적 정치의 장을 만드는 데 있음은 명약관화하다.

 

3. 노동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학생회로

대학인들이 민주주의 담론을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한 것이 아니듯, 노동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대학인들이 직면한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고시와 취업을 준비하는 식의 개인적인 방식이며, 집단적인 방식에서는 도저히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두 사람이 노동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들을 개인의 공간에 머물게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개인적인 취업 준비 역시 개개인에게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엄혹한 시대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경쟁의 강도가 강화되었고, 수많은 '능력있는' 개인들은 개인적인 노력에 한계가 존재함을 절감하고 있다. 이렇게 더 이상 개인적인 해결책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대학인들은 집단적인 정치의 장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경제위기를 맞아 그러한 징조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모든 대학인들이 공통된 현실 하에서 공통된 불안을 겪고 있다는 것은, 도리어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망일 수 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한 몸부림은 개인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날지언정, 그 불안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실업자의 수가 증가세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새로운 시장 창출이 이미 거의 불가능해진 사회에서 그/녀들의 불안과 연대감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연대감은 촛불집회와 같이 크게 타올랐다가, 어떠한 거시적인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단적 직접행동의 시도들이 지속되고, 이를 통해 아래로부터의 정치와 연대에 기반한 공동체들이 재건될 때, 노동 문제 해결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새로운 토대가 놓여질 것이다.

학생회는 바로 이러한 시도들을 엮어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사회대 학생회가 특수한 일부집단이 아닌 대학인들과 노동자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들을 지향하는 관악 사회대 학우들의 대중조직이라 할 때, 사회대 학생회는 경제위기로 인한 청년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 문제를 발화할 수 있는 장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사회 경제 구조로 인해 마찬가지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 전체를 잠식해나가고 있는 지배계급의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들이 생성될 것이며, 진정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안적인 사회가 추상적으로나마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부족한 것은 대학인들의 고통이나 고민이 아니다. 오로지 그/녀들의 이야기를 묶어내고, 현실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도전이 부족했을 뿐이다.

 

3.1. 집단적 정치만이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알려내자!

청년실업의 문제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고 하지만, 개인의 조건에 따라 불안정 노동이나 실업의 문제는 다르게 인식되기도 한다. 관악 사회대의 경우 ‘실업’ 자체, 즉 구직의 실패에 대한 공포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경제위기로 인한 궁핍화의 양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고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소외를 느껴야만 하는 상황, 전공진입을 비롯해 다양한 과정에서 경쟁이 과열되고 있는 양상들은 당장 대학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금융권직장들에서 경제위기의 여파로 출근시간이 당겨지며 실질적 근무시간이 연장된다든가, 튼튼해 보이는 대기업도 정년이 점점 단축되어 평생직장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이 관악 사회대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는 경제위기와 궁핍화가 현재 노동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피해갈 수 있는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관악 사회대 학우들의 문제이며, 인간 보편의 문제이다.

청년실업문제가 개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거나, 가만히 기다리면 해결될 문제가 아님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해결책이 근본적인 궁핍화의 해결과는 거리가 멀기에, 구조조정과 궁핍화의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관악 사회대 학우들이 갖는 불안과 불만은 점점 확대될 수밖에 없다. 대학인들이 이러한 불안과 불만을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의 허구적인 실업대책과 노동관리 정책의 무능함을 폭로하며, 그/녀들이 확장된 공간에서 집단적인 정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금융업계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해고될 수밖에 없었던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 계약해지로 200여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한 KBS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학 사회가 개인적 해결책이 아닌 집단적 해결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이른바 '꿈의 직장'인 금융업계와 공영방송사에 취업을 했지만, 해고의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삶을 알려내고 이야기하자. 자기발전을 위해 노력해서 스펙을 열심히 쌓고 취업을 한다고 해도, 안정적인 일자리의 보장을 절대 장담할 수 없는 현실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폭로해내야 한다.

 

3.2.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들을 이야기하자!

경제위기는 당장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이 지배계급의 지배전략에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고 있다. 지배계급이 노동자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전략은 특히 분열과 포섭으로 나타난다. 분열은 노동자민중의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 노동자민중 사이에 분열을 획책하는 것이고, 포섭은 분열된 일부를 지배계급의 편으로 끌어들여 또다른 억압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경제위기 시기 일자리를 두고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 여성과 남성, 비정규직과 정규직, 저학력자와 고학력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이 다투는 상황이 바로 분열이다. 이 중 힘관계의 우위에 있는 이들에게 약간의 시혜를 주어 연대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포섭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민중은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결함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궁핍화에 직면해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집단적인 대중 정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할 때, 중요한 것은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며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권리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어느 부문의 특수한 이익 혹은 여타 부문을 차별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이 아니라, 인간 공통의 이익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관악 사회대 역시 사회의 일부분이며, 경제위기는 대학인들의 삶을 수많은 전선들로 분할하고 있다. 대학인들이 여타 사회 구성원들과 더욱 평등한 관계맺음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들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특히 모든 개인은 노동 여부와 관련없이 생존권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의지에 따라 노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자. 이는 경제위기 시기 임금이라는 무기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있는 기업을 또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할 수 있으며, 궁핍화와 청년실업이라는 현실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낼 수 있다.

 

3.3. 노동자-학생 연대를 만들어가자!

경제위기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만, 특히 당장 구조조정을 겪어야만 하는 노동자들은 경제위기의 최전선에 서서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고 있다. 경제위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구조조정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며, 자연스레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2009년 일어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금호타이어 투쟁, 대한통운 투쟁, 최저임금삭감 반대투쟁 등은 노동자들이 집단적 이기심이 아닌, 말 그대로 최소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시기임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투쟁들은 하나같이 현 사회의 잘못된 경제구조에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들이 되고 있다.

당장 관악 학내에서만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노동하고 있다. 당장 사회적인 경제위기의 여파도 만만치 않거니와, 법인화가 시작될 경우 학내 노동자 구조조정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자들은 단지 사용자에게 고용된 존재가 아니며, 공동체를 유지하고 공동체의 문화를 만들어 온 존재들이다. 그/녀들과 연대하는 일은 단지 한 개인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를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잘못된 경제구조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시기, 그/녀들과 연대하여 현 사회의 구조조정이 특정 개인의 잘못이 아닌 전체적인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알려내자.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 연대하는 과정을 통해, 노동문제를 일상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구현 : 잘 들었다. 질문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좌중 침묵

 

구현 : 없나? 다음 네 번째 교육각론 발제 듣도록 하겠다.

 

준용 : 0. 들어가며 : 오늘날의 대학교육과 대학 구조조정

오늘날 대학은 대학이 속한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로 기능한다. 따라서 대학이 처한 현실 속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항상적으로 요구되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이 과제는 한국 사회에서의 대학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국 사회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걸쳐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급속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대학)교육 정책 역시 자본이 요구해 온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적 내용ㆍ대학의 운영방식 및 자금조달 체계ㆍ학생들에 대한 통제 방식 등은 이러한 흐름에 따라 변화를 겪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학은 여전히 가장 비판적인 지식을 생산하고 있는 공간이며, 한국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실험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보편적 고등교육 제도를 만드는 과정은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로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으며, 지식권을 얻고자 했던 민중들의 투쟁이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학 내부에는 모순적인 지점들이 존재한다. 대학에는 자본과 국가의 요구에 따른 인력을 양산해 내는 기관으로서의 성격과 함께, 사회적 권리로서의 평등하고 보편적인 지식권의 실현을 담보하는 공간으로서의 성격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하에서 대학을 비롯한 교육재편이 점점 더 노골적인 형태로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 이후 발생한 교육관련 정부기관의 변화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이전 정권에서 교육정책을 관장하는 부처였던 ‘교육인적자원부’를 효율성 증대를 이유로 ‘과학기술부’와 통합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 개편하였다. 이 과정은 단지 두 개의 부서가 합쳐서 이름을 바꾼 정도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애초에 교육부에 해당하는 명칭으로 ‘교육’을 뺀 ‘인재과학부’를 선정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즉, 산업구조재편에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국가의 전략적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초 ․ 중등교육에도 재편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이를 초중등 교육에 대한 정부규제를 완화하고 학교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교육재정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적이 낮은’ 학교에 대해서 재정지원금을 삭감하는 등의 압박을 주겠다는 방침에서 드러나듯, 평가기능과 재정분배기능을 통해 시장화/상품화를 지휘하겠다는 발상을 숨기지 않고 있다. 대학부문에 있어서도 그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학 구조조정 혹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각종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는 현실이다. BK21 사업 역시 정기적으로 중간평가를 진행하여 산학협력을 비롯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연구학문을 탈락시키는 등 강력한 조처를 취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특정 대학과 특정 학과에 대한 지원을 강화함으로써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해체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대학 수와 학과의 수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른바 ‘부실 사립대’, ‘(취업) 부실 학과’를 퇴출시키고 경쟁력이 없는 학과나 대학은 통폐합을 유도하는 것이다.

서울대 역시 이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으로 ‘학교발전’을 명목으로 추진되고 있는 법인화를 들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이전부터 추진되었던 법인화는 ‘국립대운영체제에관한특별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 상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대로 법인화 법안이 통과되어 법인화를 실시하게 되면 당장 ‘국립대로서’ 받았던 정부 지원금이 삭감된다. 이렇게 줄어들 국가 지원분을 메우기 위해서 산학협력이 더욱 강조될 것이며, 이는 등록금 인상, 학문의 자본에의 종속 심화, 기초학문의 고사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즉, 개별 사립대에서 노골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이 바로 서울대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얼마 전 중앙대에서는 4000명의 신입생 중 1200명을 경영대로 선발함과 동시에 기초학문 학과를 통폐합하고, 심지어 응용학문인 공학마저도 IT와 BT 중심으로 개편할 것이라는 대학 구조조정안이 (내용 중 일부가 루머로 밝혀졌지만) 신문기사로 나왔다. 한편, 건국대에서는 학과 2개가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수익성’과 기업의 호불호에 따른 철저한 구조조정 속에서 기초학문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와 대학 본연의 의미를 찾기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2009년, 사회대에서 대학교육에 관한 논의를 제기한다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작게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서울대 사회대를 비롯한 학내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특히 교육에 관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묵과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로서 참여하는 ‘자치’를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크게는 한국 사회 전반에서 실시되고 있는 대학 구조조정을 비롯한 지식에 대한 재편을 논한다는 차원을 들 수 있다. 처음에 이야기 하였듯이 대학의 모습이 사회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할 때, 우리의 삶과 미래에 대한 해방의 기획은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란 무엇이고 또 ‘교육권/지식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차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지식인, 교육과 같은 말들의 의미에 대해 근원적으로 고민하고 검토해 봄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또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대학교육을 거론하고자 하는 최종적 목표가 될 것이다.

 

1. 교육 관련 쟁점들

1.1. 대학의 기업화

대학의 기업화는 대학 자체가 사실상 하나의 기업처럼 재단을 위한 수익 창출을 위한 기구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현상은 대학기술지주회사의 설립이다. 대학에서 보유한 기술을 사업화하기 위해 자본금의 50% 이상을 기술로 출자해 대학 내에 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 하는 대학기술지주회사는, 대학이 연구성과를 직접 활용하여 수익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지난 2008년 2월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이후, 많은 대학에서 대학기술지주회사가 설립하고 있다. 작년 2월 한양대의 ‘HYU홀딩스’가 첫 매출을 기록한 이후, 2008년 삼육대의 ‘SU홀딩스’, 서울대의 ‘서울대기술지주주식회사’, 서강대 ‘SGU홀딩스’ 등이 대학기술 지주회사를 설립했으며, 최근에는 고려대학교에서 자본금 100억 원을 들여 고려대 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대학기술지주회사 설립의 배경에는 경기불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수익구조를 창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가 놓여있다. 특히 대학-산업간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기업이 경기불황을 이유로 R&D(research and development, 연구 개발)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온 것에 대한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연구의 독립성을 보장받던 학문을 개방하여 제반시설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산업화하려는 것이다. 특히, 국립대인 서울대학교의 경우 그동안 막대한 세금을 들여 키워 온 대학의 지식과 과학기술, 연구시설을 기업으로 하여금 저렴한 투자비를 통해 이용하여 수익을 창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대학기술지주회사의 수익 창출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에서는 1차적으로는 서울대학교의 기술을 직접 사업화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기술지주주식회사의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R&D 자체가 지주주식회사 설립의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주식가치’의 상승을 통해 매각차익을 노림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 이미 서울대학교에서는 보유 중인 특허를 심사하여 회사를 설립한 뒤, 이를 코스닥에 상장 후 매각하는 과정을 통해 이윤을 내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대학기술지주회사는 노동자-민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기술 개발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이익 증대를 위한 투기대상으로 이용되고 있다.

 

1.2. 지식 ․ 학문의 상품화

2000년대 들어 각 대학에서는 이른바 ‘계약학과’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기업 혹은 정부기관과의 계약을 통해 ‘실무형 고급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되는 학과를 말한다. 계약학과는 학생선발부터 커리큘럼 개발, 강사진 운영과 졸업생 채용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기업과 대학이 공동으로 기획 운영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대학원 과정에 있는 ‘초고층 · 장대교량학과(Department of Mega Buildings and Bridges)’와 ‘임베디드 소프트웨어학과(Department of Embedded Software)’ 등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서울대 역시 첫 계약학과인 ‘E-MBA (Executive MBA)’를 경영전문대학원 안에 신설한 상황이며, 학부과정에서도 2009년 로스쿨 도입으로 법학부가 사라진 이후, ‘자유전공학부’ 등을 신설하여 각종 국가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데 각종 지원을 집중하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사회과학 ․ 인문과학에서도 지식의 상품화 ․ 상업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 기업에서 원하는 사회통계학을 강조하는 추세나 기업운영에 효과적으로 쓰이는 조직심리학은 각광받지만, 사회 비판적 학문인 마르크스 경제학(정치경제학 입문, 마르크스 경제학,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과 같은 강의는 폐강되거나 폐강 위기에 처해 있다.

이처럼 지식과 학문을 상품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논리는 ‘실용성’이다. 그동안 대학에서 키워 냈던 학생들은 기업 실무를 수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기업이나 국가 전체적인 입장에서 비효율과 비용 낭비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대학 커리큘럼은 기업 중심으로 조정되어야 하며, 공학 인증제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수업 선택을 통제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를 통해 학문 자체를 수익성과 상품성이 높은 학문을 중심으로 개편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는 기업의 입맛에 맞는 과목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줄 따름이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기업에서 바로 써먹는 방식의 ‘사회화’는 언뜻 보기에 사회에 공헌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화 방식이 정말 모두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대학이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왔고, 또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대학과 기업의 연구소가 다른 점은, 대학이 자신의 삶과 우리의 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침으로써 ‘비판적 지성’을 길러내는 공간으로 역할을 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공계와 같이 실용학문으로 분류되는 학문 역시 기술 연구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을 더욱 안락하고 이롭게 할 것인가’에 있었지 결코 ‘상품화하여 돈을 어떻게 더 잘 벌 것인가’에 있지 않았다. 초국적 제약회사에서 특허권을 이유로 약의 복제(카피약)를 금지함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챙기는 동안 제3세계를 비롯한 가난한 국가들의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질병마저 제대로 손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현실을 본다면,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지식 ․ 학문 ․ 기술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대학의 기술과 지식을 진정 ‘사회화’시키는 일은 기업과 국가의 상품화 논리로부터 벗어나서 지식이 인류 전체의 자산임을 인식하고 모두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1.3. 등록금 문제

1989년 대학이 등록금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정책이 실시된 이후, 해마다 치솟는 등록금은 대사회적인 문제로 되었다. 2008년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이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은, 등록금을 비롯해 교재비ㆍ생활비ㆍ사교육비 등을 합해 연평균 1000만원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등록금을 올리는 것에 대해 학교 측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등록금이 올라가면 그만큼 서비스가 좋아지며, 학비를 낼 여력이 없는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장학금제도나 학자금 대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 측의 논리가 진짜로 현실화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등록금 인상으로 때문에 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는 등, 서민들에게 가중되고 있는 고통의 수준은 이미 적정 수준을 넘고 있다. 학자금 대출 제도의 경우 대출한 학자금이 그대로 빚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장학금 제도 역시도 별다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 않다. 또한 학교발전을 위해 등록금을 올린다지만, 인상된 등록금으로 학교 건물을 짓는 것 말고는 학교발전의 실체는 생각보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금융투자 실패로 말미암아 수백억 원의 손실을 입는 상황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교재정의 운용방안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등록금 인상 문제는 단순히 매년 내야 하는 돈이 늘어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등록금 인상에 관한 학교 측 논리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전반적 신자유주의 ․ 대학 상품화의 기조를 파악해 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을 강제하는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학내에서의 논의와 행동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1.4.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 : 학생자치권

이전까지 학원자율화와 학생자치권력 증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던 교육투쟁은, 1990년대에 들어와 높은 교육비용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등록금 문제에 치중하는 사이, 대학의 상품화 경향은 급속도로 진행되고 말았다.

문제는 이 과정 속에서 대학 내부의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 측에서는 법인화, 구조조정, 대학기술지주주식회사 등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중앙집권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만 하더라도 법인화 법안 중에 총장의 중앙 집권적 성격 강화, 교직원 총장 투표 권한 폐지를 명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학생 자치권도 대부분 축소되고 있다. 고려대에서는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플랜 카드를 본부가 철거하는 등 비판적 목소리에 대한 탄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서울대에서도 외부업체 입점을 위해 농대 동아리방이 철거되는 등 학생 자치공간 역시도 대학 구조조정 아래서 축소되고 있다. 또한 공대에서는 행정실에서 2009년 농활 때 집회참가를 못하게 하는 한편, 공대 학생 부학장이 공대 학생회장에게 ‘아구창을 날려 버리겠다’와 같은 폭언을 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이렇게 학내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와중에 ‘학생자치권’이나 ‘정책결정참여권’과 같은 이야기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가 총장 1인의 것이 아니라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학교의 운영은 학내 구성원들―교수, 학생, 교직원 등―의 민주적 의견 수렴 절차를 통해 운영되어야만 한다.각 대학에서 추구하는 중앙집권제는 업무의 효율화가 아닌 총장 1인 독재를 불러 올 것이며, 정부는 이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조장함으로써 문제를 가중시킬 것이다. 더불어 이는 대학의 상품화에 대해 반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막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2. 사회대 학생사회에서의 교육 관련 쟁점들

2.1. 법인화

지난 9월 29일, 서울대학교 법인화 찬반 총투표가 가결되었다. 개표 결과 80%에 달하는 학생들이 현재 진행 중인 서울대학교 법인화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투표 이후 현재까지 특별한 추후 움직임은 없는 상황이다. 총학생회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뒤늦게 기자회견을 하는 것 외에는 추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우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쁜 수업과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사회대 학생사회 역시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 있다. 중간고사 기간과 맞물려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법인화에 대한 논의와 대책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총학생회 선거기간을 맞아 나온 여러 선본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에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정치’와 ‘복지’를 모두 다 잘하겠다고 공언하는 두루뭉술한 (상당수) 선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학내의 의견을 모아 법인화 문제를 발화하고 해결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대에서는 법인화 문제를 어떻게 알려 나가야 하는가? 우선, 이번 사회대 학생회 선거를 통해 적극적 발화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선거’는 한 해의 학생회 활동을 평가하는 자리이자, 동시에 학내/외의 다양한 이슈들이 오가는 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거 과정 속에서 적극적으로 법인화에 대해 알려 나가고, 이를 통해 학우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선거 기간 이훼도 법인화 문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구 혹은 공간을 마련해야만 한다. 법인화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지 못한다고 했을 때, 내년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법인화 문제를 알리고 발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2. 제2전공 의무화

‘제2전공 의무화’는 서울대에서 학과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다. 사회대, 인문대, 자연대의 08학번부터 적용되는 제2전공 의무화는 학생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이유에서 도입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이 제도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더 많은 학습을 ‘제공’해 준다고 선저하고 있다. 실제로 제2전공 의무화 학칙 개정사유로 학교 측에서 ‘전공 교육의 내실화’, ‘분과 학문체제의 극복’, ‘다양한 학문적 욕구 충족’ 등의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전공 의무화는 인기 학과에 대한 편중과 비인기 학과의 고사를 낳을 뿐이다. 제2전공 의무화 실시 이전에도, 비인기 학과의 학생들 중에서는 ‘인기 학과’로의 전과 또는 편입을 준비하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전공 의무화는 오히려 학생들의 인기 학과로의 쏠림 현상을 심화시킬 것이 자명하다. 결국 학교 측에서 목표로 제시했던 ‘전공 교육의 내실화’와는 상반되는 결과가 나올 것이 예상되며, 이는 결국 제2전공 의무화가 학과 간의 경쟁을 유발하고 구조조정의 명분을 제공하여 대학의 상품화를 지속하려는 의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2전공 의무화에 대한 반대 움직임 역시 2008년 도입 당시의 ‘개나리 투쟁’에서 그치고 말았다. 제2전공 의무화 찬반을 묻는 총투표에서 90%에 달하는 학생들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투표 이후 지속적인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결국 학우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제2전공 의무화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08, 09학번들 역시 졸업 요건을 달성하기 위해 바쁘게 달려가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면서 오히려 자기계발의 분위기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따라서, 제2전공 의무화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서울대에서 추진되고 있는 법인화 과정과 제2전공 의무화가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결국, 학우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학내 구조조정에 대해 알려나가고 법인화, 등록금, 제2전공 의무화 등의 이슈를 함께 논의해 나가야만 한다.

 

3.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하여 : 보편적 권리로서의 지식권과 2010 교육투쟁

이상의 논의에서 현재 대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구조조정을 비롯한 학문과 지식의 상품화의 허구성과 기만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뤄지고 있는 상품화 과정에 대한 비판에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이 등록금에만 집착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전반적 재편에 대해 놓칠 수밖에 없었듯이, ‘지식’과 ‘교육’에 대한 근본적 고민 없이 현재 이루어지는 과정들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채 헤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보편적 지식권의 쟁취를 통한 지적 차이의 감축’이 바로 고민의 지점이 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대중교육을 볼 때, 이미 우리에게 보편적 지식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대학기술지주주식회사나 전반적인 지식의 상품화 과정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오늘날 (특히 전문적) 지식은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처럼 지식이 특정한 소수의 손에 들어가고, 민중들이 지식의 위계 속에서 불평등한 체제에 순응하게끔 만드는 구조에 대해 비판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2010 교육투쟁은 빈곤의 문제로서의 등록금 의제, 선택권의 문제로서의 학제 개편 의제를 철저히 다루되,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제기를 해나가는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한다. ‘지적 차이의 심화’라는 문제의식을 지니지 못한다면, 단순히 등록금이 내려가고 학문의 다양성이 존중되기만 하면 모든 교육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하지만, 지적 차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보편적 권리로서의 지식권에 대한 논의에는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교육투쟁들이 과/반, 동아리, 단대, 총학생회 차원에서 모여 대중적인 투쟁을 건설해 내지 못했다는 점을 직시하고, ‘국립대 법인화 반대’와 같은 구호만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학우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민해야만 한다. 2009년의 정세가 위기였다면,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2010년의 정세전망 역시 위기로 나타날 것이라면, 이제는 직접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기획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구현 : 잘 들었다. 질의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달라.

 

좌중 침묵

 

구현 : 없나? 다음 각론 발제로 넘어가겠다. 문화와 공간 각론 발제 부탁드린다.

 

준용 : 1. 대학문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이번 학생회 선거에 임하면서 문화/공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학내 문화를 ‘대학문화’로 일컫고자 할 때, 그것이 ‘대중문화’나 ‘문화’ 일반과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학계와 저널리즘계의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공유하고 있는 최소적 정의로서의 문화는 ‘인간의 삶의 양식’이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 ‘대학문화’는 대학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의미에 덧붙여 시대와 역사의 산물인 저항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학문화란 곧 민중문화의 다른 표현이었다. 기존의 대중문화와는 달리, 사회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곧 대학문화였던 것이다. 학내 문예패와 학회 등의 다양한 문화창출의 공간들은 대학문화의 그러한 저항성을 체현해내는 산실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문화의 속성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문화산업의 팽창과 함께 대중문화가 급속히 상업화되면서 그 영향력은 사회 각 부문에 침투하였고, 대학 역시 이러한 물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학내에서 대중문화의 기조에 부합하는 문화들이 지반을 넓혀감에 따라 대학문화는 대중문화를 획일적으로 답습하는 하위문화로 전락하였다. 녹두거리나 엠티문화의 변화사만 조망해 보아도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저항을 위한 거점이었던 학내와 대학가가 얼마나 빠르게 최신 유행과 최첨단 소비문화의 전시장으로 변화하여 왔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학우들의 대학생활을 구성하는 활동과 담론들 또한 상업화된 대중문화의 흐름을 좇아갔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상업화의 대상이며 소비의 대상이라는 대중문화의 속성은, 기존 대학문화의 저항성과 창조성, 자치성을 탈피시켰다. 대학문화는 더 이상 대학인이 스스로의 열망과 고민으로부터 가공하고 산출해내는 무언가로서,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무언가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리어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편리한’ 소비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학내에서 주류적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는 역할 또한 일정 부분 떠맡게 된 것이다. 생산물이 아닌 소비 대상으로서의 대학문화는 자연히 아마추어리즘을 지양하고 전문성을 선호하는 대중문화의 속성을 띠었고, 따라서 학우들 사이에 ‘뛰어난’ 문화 생산자들과 그것을 소비하는 ‘구경꾼’이라는 구분선을 긋게 되었다. 이는 대학문화 안에 ‘나’의 이야기와 고민들이 자유롭게 우러나 타인의 그것들과 만날 수 있는 수 있는 공감대와 공간의 소멸로 귀결되었다.

현 시기 대학문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 모색은 이러한 인식의 지반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상업화된 문화의 침투에 대안 없는 반대의 목소리만을 내거나, 문화를 소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학우들을 매도하듯 질책하고 문화의 생산만을 독촉하는 것은 올바른 대응방안이 될 수 없다. 또한 기존 대학문화의 특성이었던 저항성만을 지고의 가치로 추켜세우고, 그 아래에 학내 모든 문화를 수렴시키려는 것은 또다른 획일화의 위험을 내포한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대학문화의 상품성과 소비성, 획일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대학인의 삶의 양식으로서의 대학문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핵심적인 요소들, 즉 창조성, 자발성, 자생성, 저항성 등의 재생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그것을 도모하며, 그것을 체현할 수 있는 원리로 구성되는 공간의 기반을 넓히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 하에서 대학문화의 상품화와 소비문화의 학내 침투가 제기하는 위협의 양태를 보다 섬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문화의 상품화/소비문화의 침투에 맞서 자치적이고 해방적인 대안적 대학문화를 모색하자

문화가 별 의심 없이 상품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현 시기에, ‘나’도 문화의 주체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점차 낯선 것이 되어가고 있다. 팽창하는 ‘문화산업’의 시대에 문화는 어떤 전문적인 생산자에 의해 만들어져서 나에게 소비의 대상으로 던져지는 상품이 되었고, 대학문화도 그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본래 문화가 인간의 삶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을 의미함을 상기할 때, 문화를 생산할 권리는 소수에게 돌아가고 다수에게는 그것을 소비할 권리만이 남았다는 사실은 다분히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문화의 프로슈머(Prosumer)가 되어 각기 다양한 문화들을 생산하는 동시에 소비할 수 있다면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 즉 문화의 전면적인 상품화와 그것이 수반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들에 가해져야 한다. 문화의 상품화와 소비문화의 확산이 초래하는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문화의 획일화와 위계화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상품성이 문화를 평가하고 순위 매기는 척도가 됨에 따라, 문화의 생산방식과 내용은 일제히 상품성의 제고를 목표로 구조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소위 상품가치가 낮거나 주류적 기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차별받는다. 자본주의에 포섭된 문화는 더 이상 다채로운 모양의 삶 그 자체와 직접 맞닿아있지 않다. 그것은 삶의 양식이 아닌 소비의 양식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문화의 상품화가 야기하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자기해방으로서의 문화의 실종이다. 이 때 자기해방으로서의 문화란 그/녀들이 자신의 고민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녹여내어 자발적,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답을 모색하는 활동태와 그 결과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비의 양식이 된 문화는 더 이상 그/녀들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과 고민이 총화된 주체적인 구성물이 되지 못하고, 주류적 가치와 상품성에 의해 재단당해 서열 지워지는 경쟁의 체계에 구속되게 되었다. 학우들의 꿈과 고민은 있는 그대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들은 상품성과 경쟁 논리를 외치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때로는 암묵적인, 때로는 노골적인 압력에 의해 깨뜨려지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다. 그 안에서 자기해방과 자기표현의 양식으로서의 문화는 주류로부터 배제되어 설 자리를 잃거나, 또는 그마저도 소비에 적합하게 이미지화된 상품으로 자본에 포섭되는 길을 걷는 운명에 처한다.

그렇다면 학내에서 적극적으로 문화의 판과 틀을 바꾸어 나가기 위한 움직임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앞서 강조했듯이 그것은 학우들로부터 창조성, 자발성, 자생성, 저항성을 끌어냄으로써 소비적 문화의 범람에 맞서 대안적 문화를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대학문화를 자치와 해방의 원리로 다시 엮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오늘날의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은 어디에서나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금 다른 문화, 예컨대 지금보다 덜 통속적이거나 보다 ‘쿨한’ 문화를 소비한다고 해서 문화의 의미가 대안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음은 결코 아니다. 대안적 문화는 학우들에게 자발적 창조와 자기해방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매체든 학교본부든 학생회든 외부로부터 잘 가공되어 소비될 수 있는 형태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아마추어적이고 평범하더라도 그/녀들의 목소리가 온전하게 녹아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문화도 결코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해방적인 것이 될 수 없다.

 

3. 우리의 공간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총론과 여타 각론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는 기층의 공동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곳을 구성하는 ‘나’와 ‘내 옆 사람’이라는 가장 미시적인 관계부터 착목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시시각각의 소소한 변화의 움직임들이 구현될 수 있는 장으로서의 학내의 공간을 다시 사고하고 우리의 언어로 재전유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학관, 총장잔디, 중도, 사회대, 학생회실, 과/반방, 강의실, 동아리방, 라운지- 나열하자면 셀 수 없이 많은 학내의 다양한 공간들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것들은 내가 매일같이 스쳐 지나가다가 종종 생각나면 머무르기도 하는 물리적인 장소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흔히 기층 단위라고 일컬어지는 과/반, 학회, 동아리 등을 비롯한 학내의 다양한 공간들은 그 자체로 학생사회가 발 딛고 서 있는 기반이며, 대학인의 존재양식인 대학문화가 자율적으로 배태되고 창출될 수 있는 장이다. 또한 그러한 공간들은 대학생활에서의 대부분의 관계맺음이 이루어지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특히 기층 단위들은 나름의 내부역학과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에 그 자체로 사회화 기능을 담당하는 하나의 장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만큼, 기층 공간이 갖는 의의와 중요성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 위에서 우리는 학내 공간을 1) 공간 자체의 확충을 통한 자치, 소통의 기반 확대와 2) 그 공간을 채워나갈 이야기들과 원리에 대한 고민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고해보고자 한다.

공간/공동체는 학생 자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학내에서 학우들이 한 뼘 공간을 확보하는 것조차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산을 깎아 가면서까지 새 건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가고 리모델링도 꽤나 자주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한 새 공간들의 이름은 ‘학생’이나 ‘자치’와는 거리가 멀고 ‘발전’이나 ‘기업’과 친밀한 것 같은 이름들이다. 그 과정에서 방을 빼앗기는 동아리가 생기면 생겼지, 어떻게든 공간을 확보해 보려는 학생들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학교에 새 건물들을 기증하고 있는 모 재단은 애초에 학생들 모임 장소를 제공해 줄 용의는 없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번에 서울대가 수 계단이나 순위가 상승해 화제가 된 학교평가의 평가기준에 연구공간이 들어간다고 하여, 학교는 동아리방을 접수하면서까지 연구공간을 확장하려 애쓰기도 한다. 왠지 건물도 많아지고 구조도 개선되는 것 같아 우리 단위도 공간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소망이 들만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이 한 두 개가 아닌 것이 현실이다.

모임이야 어디서든 하면 됐지 굳이 고정적인 공간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공간 운운하며 학생운동의 위기를 말하는데, 운동이 위기라고는 해도 개개인의 역량 제고와 사람 수 늘리는 데 주력하는 것이 답이 아니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발 딛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물리적 기반인 ‘공간’이 어느 정도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위기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위기냐, 아니면 그 안에서 다시 솟아오를 가능성을 키워나갈 수 있느냐가 갈리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공간은 그곳을 전유하는 구성원들이 상호 교통하고 행동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공간은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이 집합하는 장소이고, 서로 부딪치면서 자율적인 논쟁과 소통을 만들어내는 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은 그 연장성(extension) 내지는 ‘물리적으로 존재함’이라는 속성 자체로 인해 공간 밖의 학우들과도 교통할 수 있는 매개를 제공한다. 평소에 별 생각 없이 라운지 앞을 지나다니는 누군가라도 동아리방 문에 붙은 ‘사연’ 문패를 보면서 몇 번에 한 번쯤은 ‘사회대’에서의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기 위한 ‘연대’가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촉발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간의 존재 그 자체가 충분히 간접적인 소통의 매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상징적인 차원일 수 있으나 그 중요성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간 자체의 확충은 기층으로부터의 문화 창출과 자치 형성을 위한 선결조건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공간들을 구성해내는 원리와 방식이다. 단순히 공간의 양적 팽창만이 학생사회의 자치활동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순진한 것이며 환상에 불과하다. 자치는 공간의 물리적 존재에서 나아가 그 공간 안에서 ‘내’가 내 옆 사람과 관계맺는 바로 그 방식에서부터 태동하는 것이며, 이것이 그 공간을 채우고 꾸미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될 것이냐를 논함에 있에서는 현 시기 대학문화나 공동체 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안적 원리의 공간은 기존의 문제점들을 적극적으로 시정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원리로서 관계맺는 공간을 만들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기층 공간에서의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풍토들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그것들이 여/남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맺음을 어떻게 저해하고 있으며, 공동체 내의 특정 구성원들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차별/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적극적으로 알려내자. ‘공동체 단합’이라는 구실 하에 문제제기 없이 반복되어 왔던 성편향적 놀이 문화나 엠티 또는 술자리에서의 잘못된 관습들을 지적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차별을 지양하고 차이를 긍정하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우애로운 관계맺음의 원리를 공간 안에 확립하자.

자치적인 논쟁과 소통의 원리로 구성되는 정치의 공간으로서 기층 공간을 바꿔내자. 조금 더디고 덜 효율적이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부딪쳐 가면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의 경험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 현 시기 학생사회의 기층운동을 내부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는 주된 원인 중 하나인 공사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는 기층 공간을 급속하게 탈정치화시키는 동시에 그곳을 편안하고 가벼운 이야기들만이 통용될 수 있는, 구심점 없고 해체적이며 말초적 안락만을 제공하는, 그럼으로써 경제위기의 시대에 불안해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학생들에게 간간이 서비스적인 복무를 수행하는 공간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기층 공간이 ‘무거운 얘기’, 나와 상관없는 ‘정치 얘기’가 만연해서는 안 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사고되고 있음을, 그럼으로써 학생사회의 자치적 소통의 영역을 소멸시키고 있으며, 자기 이외의 문제에 초연하게 오로지 자기계발하는 존재로서의 학생이라는 상(像)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음을 알려내자.

단순히 다양한 목소리들이 병렬적인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보편적 권리를 지향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학생회/학생사회 각론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기층 공간이 매우 사적인 영역으로 사고되면서 다분히 배타적인 공동체중심주의적 사고가 만연하였다. 그 안에서 당장 ‘나’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은 어떤 보편적인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고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다. 또한 많은 학우들은 어떤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특정한 당파성과 편향성을 띤다고 기피하면서, 학생이 어떤 목소리를 내든 또는 아예 내지 않든 그것을 다원주의적으로 포용하는 것이 학생의 대표기구인 학생회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말한다.(이러한 입장에 그 자체로 내재된 정치성에 대해서는 학생회/학생사회 각론에서 자세히 논의하였다) 이러한 인식들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공간 이외의 다른 요소에서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활동성 강한 개인의 노력이나 어떤 형태로든지의 외압은 기층 공간에 만연하고 있는 공사분리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바꿔낼 수 없다. 지난한 작업이지만 바로 그 공간 내부로부터의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어가고 분위기를 바꾸어내는 것,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기층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그것을 공고히 해야 한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만 기층 공간은 단순한 도덕적 허영심에서가 아닌, 자기 자신의 문제와 사회 전체의 문제가 맞닿아 있는 고민에서 발로한, 보편적 권리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기층 공간 안에서 여성의, 장애인의, 이주노동자의, 비정규노동자의 이야기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구현 : 잘 들었다. 질의응답하실 분 손을 들어달라.

 

자전 09 주용 : 사회대생이 아니라도 가능한가?

 

선관위원장 (구현) : 사회대 학생회를 위한 자리라 그렇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다른 질의가 없다면 가능할 것도 같다. 리바이브 동의하는가?

 

준용 : 동의한다.

 

구현 : 소속 밝혀주시고 부탁드린다.

 

주용 : 지금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해 기층에서부터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동의. 자전이라는 새로 생긴 미약한 단위에서 과장을 맡고 있다. 사회대 학생회 차원에서 과반이나 더 하위인 학회 등과 같은 단위를 움직이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구체적인 방안이 있는가? 기층단위에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준용 : 우리도 고민하는 부분이다. 문화란 문화에만 맡겨놓기엔 너무 중요해서 문화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과반문화가 잘못 구성되어 기존 지배 이데올로기에 지배된다면 활동가 한둘이 떠나면 기존대로 돌아가고 마는 사례가 많다. 공간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가, 공간 내부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주체가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과반, 학회만으로 얘기하기 확실히 힘들다. 총학생회, 사회대 학생회 등과 얘기가 되어야 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같이 논의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두 번째의 문제는 기존에 자치단위가 있는 과반, 동아리 등을 세가지로 나눠서 해결책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공동체가 나름대로 활성화 되어있는 단위, 둘째 공동체는 존재하나 학생회나 자치단위가 활성화되어이있지 않은 단위, 셋째 공동체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어있지 않은 단위. 세가지를 모두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사회대 학생회같은 상급단위가 장기적 계획 세우는 게 가능, 단발적 행사가 아닌 장기적으로 어떤 문화를 만들지에 대한 플랜을 가지고 제도적으로 보장해나갈 수 있다. 이번에 리바이브 선본은 여성국이라는 걸 고려. 문화팀. 겨울듣기 준비팀. 새로운 대안문화의 주체로서 새롭게 만들어낼 생각이다. 여기서 장기적인 계획 도출을 통해 각 과반에서 활동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여기서 성장한 활동가가 과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기층단위들과 지속적으로 소통을 해서 필요한 것들을 확충할 것. 장기적 계획 필요.

 

구현 : 잘 들었다. 다음 질의? 없으면 다음 마지막 각론 생태와 환경 넘어가겠다.

 

준용 : 정확히는 보론이다. 그래서 제목도 과격하다. 이명박정권의 기만적인 녹색 성장을 규탄한다!

0. 저탄소 녹색성장의 등장

남한 사회에서 생태환경에 대한 문제제기는 애당초 공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단어 자체에 '공공의 피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듯, 공해에 대한 문제제기는 생태환경 자체보다도 오염으로 인한 민중의 피해와 연관되어 있었다. 산업화의 과정이 어느정도 완료되고, 도시위생환경이 과거에 비해 향상되면서 본격적으로 생태환경의 파괴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관심이 높아져가던 생태환경의 문제는 부안 핵폐기물시설 건립문제, 시화호 문제, 천성산 도룡뇽 지키기, 태안 앞바다 유조선 침몰 등의 사건들을 거치며 전사회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정부조직에서도 1980년 환경부 설립 이후로 다양한 방식으로 생태환경의 문제에 개입해왔으나, 이는 생태환경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위한 역할보다는 국가 영역의 개발 과정에서 적합성을 인가하는 식의 소극적인 개입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정권은 저탄소 녹색성장을 국가의 비전으로 삼겠다고 발언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녹색성장은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녹색 기술과 청정에너지로 신성장 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국가발전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부과제로 재생에너지 산업 등 녹색기술을 통한 일자리 창출, 그린홈 100만호 보급사업, 그린카 세계 4위 국가 도약을 제시했다. 최근의 라디오연설에서는 국제에너지기구의 입장을 인용,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3분의 1 이상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절약을 제 5의 에너지라고 한다”며 녹색생활을 통한 에너지 절약을 강조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에너지를 사실상 100%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10%만 절약해도 한 해에 10조원 이상을 벌게 된다”며, “국민과 기업에게 정책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빨리 변화해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행동하는 동시에 국익도 적극적으로 챙기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생태환경의 문제는 분명 전세계적인 문제이며,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이명박 대통령의 '저탄소 녹색성장'과 '녹색생활을 통한 에너지 절약'은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분명 국가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변화이다. 그러나 녹색성장과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안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이 사실 ‘녹색분칠’(greenwash)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생태환경의 문제가 결코 유보될 수 없으며, 당장 노동자민중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임을 고려할 때, 녹색성장이 오히려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쉽게 넘겨들을 수 없다. 과연 이명박 정권의 녹색 성장은 생태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가?

 

1. 저탄소 녹색성장의 실체

1.1. 4대강 살리기 사업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이다. 애초에 한반도 대운하라는 듣기조차 민망했던 공약에 녹색을 덧칠해서 만들어 낸 정책이다. 한반도대운하에서 시작한 4대강사업은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4대강 정비사업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그 또한 여의치 않자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고 이름을 바꾼 채 지속되고 있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개략은, 4대강에 20여개의 보를 막고 5.7m³의 골재를 파낸다는 것이다. 일종의 거대한 직강공사를 하겠다는 뜻인데, 직강공사가 완료된 강들조차 이전 상태로 복원시키고 있는 해외의 사례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이다. 멀쩡한 강에 보를 세우고 골재를 파내면, 당연히 강물은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지난 10월 22일 열린, 국토부와 환경부의 국정감사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얼마나 허황된 정책인지 여실히 드러내었다. 수자원공사가 작성한 내부문건이 국정감사 자리에서 공개되었는데, 이 문건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자원공사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지 법적 검토를 의뢰하였는데, 결론적으로 하천법과 수자원공사법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렇듯 4대강 사업이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토부는 수자원공사에 4대강 사업 추진을 반강제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수자원공사가 8조원이나 되는 사업비 부담을 들어 4대강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고 국토부에 공문을 보냈으나, 얼마 후 이사회를 열어 사업 추진을 돌연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라고 밝힌 것이 정부가 국고를 통해 금융비용을 지원해주고, 4대강 유역의 개발권까지 주기로 했기 때문이라 한다. 거기다 이렇게까지 해도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 투자비를 별도로 지원받기로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게다가 이후 추가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정부는 국민연금까지 끌어다 4대강 사업에 투입하려 했다고 한다. 법적인 근거조차 희박한 사업을 말 그대로 노동자민중의 고혈을 들여 시행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명박 정권이 4대강 살리기 사업에 얼마나 목을 메고 있는지 보여준다. 또한, 이명박 정권이 법적 하자에도 불구하고 4대강 유역을 개발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정감사에서는 4대강 사업에 대한 환경영향평가의 부실 또한 드러났다. 계절의 변화가 분명한 남한 생태환경에서 환경영향평가는 최소한 4계절 평가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불과 몇 달만에 환경영향평가를 마치고, 사업 적합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환경영향평가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땅히 진행되어야 할 예비타당성 조사 또한 편법으로 시행령을 고쳐서 생략하였고, 사전환경성검토도 엉터리로 진행하였다.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야 할 사항은 예산 돌려막기이다. 국토부는 전체 사업규모를 22.2조에서 15.4조로 줄여서 발표했는데, 이는 4대강 사업과 관련해 환경부와 농림부 등에서 집행하는 예산은 빼놓고 오로지 국토부 예산만 추려서 발표한 것이다. 이 15.4조마저 부담이 되자, 다시 8조원을 수자원공사로 떠넘겼다. 예산 떠넘기기는 국가 관청 사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도로공사와 한전, 심지어 민간 통신업체와 맥주회사에에까지 4대강 사업 예산을 떠넘기고 있다. 이러한 예산은 세금의 방식이든, 아니면 여타 기업들의 상품 가격 인상이든간에 결국 노동자민중의 주머니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22.2조라는 돈은 친환경농업 지원 등의 진정한 생태주의 운동 지원 뿐만 아니라, 저소득층 의료복지 무상화, 비정규직 정규직화, 장애인 도우미 지원 등에 쓰이고도 남을 만큼 큰 돈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이런 거금을 몇몇 토건자본과 투기자본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하여 많은 부분에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건교부 장관을 지냈던 이용섭 의원은 정부가 4대강사업으로 34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생길 일자리는 단순 육체 노동 위주로 4만개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4대강 사업이 진행되면 공사중에 130만명이 식수대란을 겪을 수 있다는 의견도 개진되었다. 4대강 사업이 생태환경의 보존은 물론이거니와, 노동자민중의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데에도 한계가 분명함이 이렇듯 밝혀졌음에도, 환경부 등에서는 문제해결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4대강 사업을 홍보하는 데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붇고 있는데, 4대강 사업 홍보비로 지난 1년간 14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환경을 지키라고 있는 부서가 거꾸로 잘못된 사업을 홍보하는데만 열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애당초 무리였음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다. 심지어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자들마저도 고개를 가로저었던 경인운하를 '경인아라뱃길'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며, 경인운하가 '녹색 뱃길'이라고 광고하고 있는 현실은 이명박정권이 생태환경을 어떻게 사고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팔당댐 인근 유기농업부지가 환경을 파괴한다고 갈아엎고 자전거도로를 만들고, 고속전철의 조기완공이 오염물질 배출을 줄이기에 녹색 뉴딜의 일환이며, 원자력이 친환경적 에너지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명박 정권이 말하는 녹색 성장의 실체이다.

 

1.2.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최근 이명박 정권은 온실가스 감축목표 설정에 관한 3가지 시나리오를 언급하면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부탁했다. 이명박 정권이 제시한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는 2020년까지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 수준을 2005년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주요 선진국의 목표인 2012년까지 1990년대비 5.2% 감축과는 매우 수준차가 높다. 한국은 이미 온실가스 배출 세계 9위 국가이며, 1990년에 비해서는 두 배 이상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유지한다는 것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사실상 차이가 없다. 실제로 이명박 정권은 지난 3월 환경부의 온실가스 감축계획을 폐기시켰고, 5월에는 상수원 보호지역을 대폭 축소하고 규제를 완화했다.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가발전’의 패러다임이라 주장하고, 그 내용으로 재생에너지 산업, 주택사업, 자동차 산업을 꼽은 것 자체가 과연 그것이 '저탄소'에 어울리는 정책인지 의심하게 한다.

녹색성장의 위선은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이하 에너지기본계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명박 정권의 에너지기본계획은 2030년까지 한국사회 에너지 체제의 장기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수요전망과 수요관리 분야’를 살펴보면 정부는 2030년까지 연간 GDP성장률 3.7%, 2030년 석유 1배럴당 118.7달러로 예측하고, 총에너지 소비가 연평균 1.6%씩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 기간 동안 에너지효율은 47% 향상해 에너지원단위를 0.347에서 0.185로 낮추고, 총에너지 소비 증가율을 1.1% 수준으로 유지할 예정이다. 그러나 여전히 에너지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해서 2006년 2억3340만TOE인 총에너지 소비가 2030년 3억40만TOE로 28.7%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부안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2030년까지 유가가 배럴당 118.7달러에 머문다는 전망은 기대에 불과할 뿐 현실적이지 못하다. 유가는 현재도 120달러를 넘나들고 있고 장기적으로 150달러나 200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특히 최근에는 석유생산량이 ‘허버트 곡선’이라는 종모양의 곡선을 그려 생산량이 정점에 달한 후 감소할 것이라는 피크오일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에너지기본계획은 150달러 이상의 초고유가를 예상하고 에너지수요 자체를 줄이는 노력을 주요 내용으로 담아야 한다. 특히 한국은 산업에서 제조업 비중은 비슷한데 1인당 GDP가 세 배 정도 되는 독일과 일본보다 1인당 에너지 소비가 많다. 따라서 환경시민단체들은 장기적으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수요를 조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국가의 사례를 보면 어느 정도 경제수준이 된 이후에는 경제성장이 오히려 에너지 수요를 감소시켰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2030년까지 에너지 소비가 연평균 1.6%씩 증가한다는 안은 에너지 수요관리에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목표다.

‘에너지원 구성방안’ 측면에서 보자면 에너지기본계획은 최종에너지 수요에서 연간 신재생에너지 증가율을 7.0%로 예상하고 있다. 전력 수요는 연간 1.7%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며 석유의 낮은 증가(0.2%), 석탄 증가율의 감소(-1.6~2.0%)를 원자력 발전으로 채울 계획이다. 결국 재생가능에너지는 전력 공급 비중에서 11%인 반면 원자력 발전은 현재 설비 비중 26%를 41%로 상향 조정할 계획이다. 발전량 비중으로는 원자력 발전을 현재 전력생산의 35.5%에서 59%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를 현재 가동 중인 20기,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인 8기외에도 10기 더 건설하겠다는 안이다. 이미 한국은 원자력 발전 시설용량으로는 세계 6위, 전력 생산량 중 원자력 발전 비중에서는 세계 4위다. 또 국토 면적 대비 원자력 발전 시설용량은 압도적인 1위로 어느 국가보다 원전 밀집도가 높다. 2016년까지 현재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인 8기가 추가된다면 이 수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계획을 실현하려면 기존에 원자력 발전소가 입지했던 네 지역 이외에 추가적인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데 지역주민의 반발과 엄청난 온배수 유출로 인한 해양환경 파괴가 예상된다. 또 정부는 안면도, 굴업도, 부안 등지에서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치루고 20여 년 만에 현금 3천억 원과 각종 특혜제공 약속, 부정선거로 중저준위 핵폐기장 부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정말 위험하고 마땅한 처리방법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법에 대해서는 에너지기본계획에서조차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태다.

원자력이 고유가나 기후변화의 대안이 된다는 이명박 정권과 산업계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원자력 에너지를 자가 동력원으로 하는 공장이나 핵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원자력 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전력 부문뿐이다. 그런데 전기는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고작 17%를 차지한다. 총 석유 소비에서 발전용으로 사용되는 석유는 3.5%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유가의 대책으로 원자력 발전을 내세우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기후변화의 대책으로 원자력을 내세울 수도 없다. 원자력 발전의 원료인 우라늄은 현재 추세라면 앞으로 50년 정도만 쓸 수 있다. 원자력 발전으로 기후변화를 막으려면 전 세계적으로 2,000~3,000개의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 건설해야 하는데 이는 현재의 기술과 자원량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원자력 발전에서 발생한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방법이 없고, 인간의 실수로 인한 사고 위험을 제거할 수 없다.

에너지기본계획은 원자력의 비중을 과도하게 설정한 반면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인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낮게 설정했다. 중국조차도 2030년이면 전체 에너지의 2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2030년까지 11%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더군다나 그 내용을 보면 기존 화석연료의 효율을 높이는 석탄액화가스화나, 에너지 투입이 더 필요해서 재생에너지로 분류할 수 없는 수소에너지, 연료전지, 폐기물 소각열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2011년까지 신재생에너지 5%로 확대할 목표를 제시했는데 그 후 19년간 6%를 더 늘리겠다는 목표는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대해서 정책의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에너지기본계획은 이명박 정권의 이른바 저탄소 녹색성장이 그저 허울 좋은 선전에 지나지 않음을 더욱 명확히 알려준다. 이명박 정권은 생태환경의 보존과 관련해서는 지식도 능력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의지 자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하다못해 생태환경에 대한 인식마저도 희박한 상황이다. 이명박 정권의 이러한 인식 부족은 국제적인 정치적.경제적 상황들과 맞물려 더욱 큰 노동자민중의 피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진정한 녹색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고민하며, 노동자민중으로부터 힘을 얻는 새로운 방식의 정치를 시작해야 할 때다.

 

2. 관악 사회대에서 생태환경담론을 이야기하자

생태환경의 문제가 분명 전사회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사회과학적인 분석 역시 매우 필요함을 떠올려 볼 때 그동안 관악 사회대에서 생태환경담론이 부차화되어온 현실은 안타까운 지점이 많다. 이러한 현실은 당장 사회대 학우들의 삶의 문제로 떠오를 수 있는 생태환경의 문제가 학생회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관련 역량의 축소로 이어졌다. 다만 전체 관악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몇몇 동아리들과, 사회학과 관련 강의로 개설된 환경사회학 등의 수업을 통해 생태환경담론의 개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정작 광우병 쇠고기 수입 파동이 터졌을 때나 태안 앞바다 유조선 침몰 등의 사건에서 학생사회가 제대로 된 입장을 갖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당장 관악 사회의 문제였던 관악산 터널 문제에서도 공통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한계를 낳았다. 당장의 녹색 성장 사업 역시,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여타의 문제들이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생태환경문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며 개인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생태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생태환경담론을 확장시키고, 적극적으로 의제를 제시함으로써 광범위한 인민들 사이에 생태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넓혀나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실질적인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생태환경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야한다.

생태환경에 대한 고민은 이미 늦었을지 모르나, 분명 지금 시작되어야 하는 고민이다. 역량의 부족 등으로 인해 관악 사회대에서 당장 구체적이고 거시적인 계획을 도출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생태환경담론이 발화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노력은 분명 필요하다. 생태환경과 관련된 교양 및 강좌를 마련하고, 생태주의를 고민하고 있는 학내 동아리들과 연계하는 방식들로 부족한 역량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태환경과 관련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회대 학생회가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관련 강좌들과 서적들을 소개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관악 사회대에서부터 생태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 이후 생태환경문제에서 사회대 학우들이 정치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력을 통해 대안적인 사회 역시 생태환경에 대한 노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더욱 넓게 알려낼 수 있을 것임은 자명하다.

 

구현 : 마지막 발제까지 잘 들었다. 질의하실 분 손 들어달라.

 

좌중 침묵

 

구현 : 없나? 열을 세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10분간 휴식. 25분에 다음순서부터 시작하겠다.

 

<< 휴식 >>

 

구현 : 십분간 휴식을 취했다. 계속 이어서 정책간담회를 진행하겠다. 순서에 기입하지 않았지만 자유패널 질의응답 전에 선관위 전체 질의응답이 있다. 마찬가지로 질의 3분, 답변 5분 부탁드린다.

 

구현 : <RE-VIBE>선거운동본부에서는 ‘학생사회의 위기’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RE-VIBE>선거운동본부에서 추구하는 학생회의 상은 무엇입니까?

 

준용 : 학생들이 존재하는 한 학생사회 혹은 학생운동이 절멸을 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위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사회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학생사회는 기본적으로 학우 대중의 상호호혜적인 관계맺음으로서 학우들의 일상을 지탱하며, 역사적으로는 대안적인 지식과 실천의 담지자로서 남한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권리와 진보를 고민하는 기반이었습니다.

2009년 현재 학생사회는 두 가지 역할에서 모두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이는 학생사회에서 기층 공동체의 해체와 진보 진영의 헤게모니 상실이 진행된 결과입니다. 민주화 혹은 통일 등의 거대한 과제를 설정하고, 기타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던 과거 진보담론은 개인의 일상적인 문제들이 정치화되는 현재에 와서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학우 공동의 문제를 발화할 수 있는 언어와 실천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생겨났으나, 학생사회는 이를 제대로 수습해내지 못했고, 이는 기층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졌습니다.

학생사회가 학우 공동의 문제를 발화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들을 찾아내는 데 일차적으로 실패한 까닭은, 학우대중의 정치가 대리적으로 사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진보진영의 정치 담론과, 지배계급의 지배담론은 정치는 대리적인 것이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분리된다는 사고방식에서 큰 합의를 이룹니다. 학우들이 직접 정치 참여의 장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은 학생사회 고유의 문화 또한 붕괴시켰으며, 학우들이 가지고 있었던 연대감 역시 잃게 했습니다.

RE-ViBE 선거운동본부(이하 선본)는 학생 사회에서 대리적인 정치 풍토가 자리 잡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물론 자본주의 및 97년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흐름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이 지식인의 위치에서 예비노동자의 위치로 추락하며, 경쟁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학우들이 정치에 참여할 여유를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RE-ViBE 선본은 여성주의적인 고민의 부족이 학생사회의 위기에 큰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학생공동체 내부에서 힘관계 왜곡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부재하는 것과, 공/사 분리를 넘지 못한 문제들이야말로 대리주의 정치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RE-ViBE 선본은 여성주의에 기반 한 공동체를 만들고, 진보담론을 쇄신하는 것이 학생사회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학생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우들의 일상적인 고민으로부터 진보적인 움직임을 찾아내고, 이를 단단한 연대로 엮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학우들의 경제적 이익 혹은 진보적인 담론을 담지해내는 것에 더하여, 학우들의 일상적인 고민과 실천을 대표하고, 학우들이 활발히 정치에 참여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RE-ViBE 선본의 목표입니다.

 

구현 : 27대 사회대학생회의 방향성과 정책을 평가해주십시오.

 

준용 : 27대 사회대학생회는 특히 정치적으로 발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용산참사부터 쌍용자동차 점거파업과 서울대 법인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진보의 요람'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동들을 해 왔습니다. 학생회 세미나를 진행하여 진보적인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특히 새맞이 기간 수시생 오리엔테이션 진행, 여성주의적인 고민의 확산을 위한 문화팀 조직 등 새롭고 훌륭한 실천들을 보여주었습니다.

27대 사회대학생회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RE-ViBE 선본과 사소한 이견이 있을 뿐, 크게 비판할 지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세잎클로버' 선본이 제출했던 정책들이 실제로 많이 이행되지 못했던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물론 생리공결제와 같은 정책들은 학우들의 광범위한 직접행동 없이는 실현이 어려웠기에 그것을 빌 공 자 공약이라 비판할 수는 있으나, 분명 학내에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논쟁이 수합될 수 있는 장이 부족하였으며, 논쟁을 일으키기 위한 충분한 계기를 27대 사회대학생회가 만드는 데 조금은 소홀해 보였다는 점입니다. 여성주의 관련 행사들은 3월 이후에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기타 행사들 역시 단발적인 시도에 그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반 학생회 등 기층단위가 붕괴되어가는 상황에서, 물론 과/반 학생회 활동가들에 대한 지원 노력은 있었으나, 과/반 학생회 자체의 재건을 위한 정책 및 실천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구현 : <RE-VIBE>선거운동본부에서 생각하는 서울대법인화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총투표로 확인한 학우들의 반대의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집행해갈 계획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준용 : RE-ViBE 선본은 관악학생사회가 서울대 법인화 비판을 위해 합의한 논거들에 적극 동의합니다. 첫째로 신자유주의적 교육재편의 흐름 하에서 전 인민의 권리이자 자산이어야 할 지식과 교육이 상품화될 수 있다는 것, 둘째로 등록금 인상의 우려가 크다는 것, 셋째로 총장에게 전권이 부여됨으로써 사실상 총장 1인 독재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 넷째로 학내 노동자들의 구조조정 위협, 마지막으로 서울대 외의 국/공립대가 위기를 맞을 수 있으며 공교육이 사실상 붕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총투표를 통해 많은 관악 학우들이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고 있음은 명확해졌습니다. 지금은 단순히 서울대 법인화의 문제점을 선전하거나, 미래의 투쟁계획을 준비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학우들은 여전히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면서도 그 정확한 논거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반대가 실질적인(물리적인) 반대로 이어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사회로부터 구체적인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으며, 서울대 법인화를 막아내기 위해서 무엇보다 학우들의 참여가 중요함을 알려내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법인화안의 국회 상정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RE-ViBE 선본은 학내외 집회는 물론이거니와 플래시몹과 같은 새로운 방식들의 실천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법인화의 문제점을 알려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 학우들의 직접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선전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학내 노동자 등 학내 주체들과 연대함은 물론이거니와, 학외의 주체들과도 연대하는 투쟁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총학생회 산하의 투쟁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후 선본연합 등의 자리에서 더욱 구체적인 계획들이 도출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구현 : <RE-VIBE>선거운동본부에서 생각하는 사회대 기층단위의 복원과 학생자치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해주십시오.

또 얼마 전 인문대에서는 과/반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삶과 인문학 강의” 실시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사회대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신입생 모집단위가 학과제로 전환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습니다. 역시 현존하는 과/반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RE-VIBE>선거운동본부는 <학과제 전환 협의체(가)>를 제시해주셨습니다. <학과제 전환 협의체(가)>를 통해, 구체적으로는 어떠한 방식으로 학과제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혼란들을 줄여나갈 계획입니까?

 

준용 : 학생자치의 활성화를 위해 RE-ViBE 선본은 기층단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학생회 및 자치기구가 존재하며, 공동체가 나름의 방식으로 활성화되어 있는 단위. 둘째로 공동체는 존재하나 학생회 및 자치기구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단위. 마지막으로 공동체 자체가 원활히 형성되지 않아, 자치를 위해 공동체 자체를 형성해야 하는 단위입니다. 이 세 가지 단위를 사회대 학생회가 지원하고 복원하는 과정은 분명 조금씩은 다릅니다.

학생자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기층단위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및 네트워크의 형성과,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학우 주체를 세우는 일이 시급합니다. 2009년 사회대 학생회는 이 양자를 모두 필요로 합니다. 이미 어느 정도 활성화된 자치단위의 경우, 사회대 학생회는 자치단위의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행사들을 진행하고 진보적 담론을 활성화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공간은 어느 정도 존재하나 주도적으로 참여할 학우들이 부재하는 자치단위의 경우, '여성국'과 같은 사회대 집행기구 설치와 겨울딛기 시즌2와 같은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사회대 학생회가 학우들에게 행사 진행 및 자치의 경험을 줄 수 있는 시도들을 해야 합니다. 이 학우들이 다시 자신의 자치단위에서 나름의 문화와 실천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공간과 네트워크 자체가 부재하는 경우, 새로운 공간과 네트워크 자체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대중 참여적 행사를 개최함과 동시에, 책읽기모임 지원 등 일상적인 공간 생산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학과제 전환 문제의 경우 학우들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 예상됩니다. 무엇보다도 과/반 자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교개협 등을 통해 서울대 본부 측에 학과제 전환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를 요구해야 합니다. 학과제 전환 자체가 논란이 될 경우 학과제 전환 자체를 막아내기 위한 실천들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학과제가 과/반 자치 등에 타격을 줄 수 있기에, 과 자치회와 과/반 대표자들이 직접 만나서 협의할 수 있는 테이블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협의안을 사회대 측에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RE-ViBE 선본은 기본적으로 학과제 전환 이후 과/반 편입 방식에 1년에서 2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둘 것을 요구하며, 과/반 학우들이 자체적으로 자치 기구를 형성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학과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장점은 받아 안은 채, 학과의 간섭이 심해질 수 있다는 단점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우들의 자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과 자치회와 과/반 대표자들의 협의 테이블을 포함하여 다양한 장에서 자치기구의 주체적인 형성을 위한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현 : 잘 들었다. 다음 순서는 자유패널 질의응답이다. 두군데에서 신청해서 김부성 학우, 학사정연 손상일 학우가 오셨다. 총론 각론 내용이 그간 잘 전달이 되었다면 질의가 더 풍성해졌을것, 남은 기간 리바이브 선본 잘 부탁드린다. 그럼 먼저 김부성 학우 질의 부탁드린다.

 

부성 : 자기계발에 대한 압박과 사회에 대한 불만이 혼란스럽게 공존하고 있다는 학생사회 분석과 여기에서부터 도출되는, 학내 정치의 복원이 과/반 학생회의 복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총론에서 대안 문화의 창출과 정치의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는 지점을 제시한 것에 비해 RE-VIBE 선본의 과/반 학생회 관련 정책들은 상대적으로 아주 새로운 것이 없어 보입니다. 과/반 주간, 학생회 학회 백서, 학술 네트워크 등은 결국 학술과 정치에 이미 관심이 있는 학우들이 참여할 만한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국 오늘날 학생사회의 학우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혼란은 새로운 정치와 조직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학우들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지언정 과/반에서 만나는 동기와 선후배들과는 세미나를 하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려 하지 않습니다. 총론에서 대안 문화와 정치의 문턱 낮추기를 언급한 부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생각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기층 학생회에서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할까요?

 

준용 : 기층 단위의 복원 방안에 대해서는 1차적으로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마지막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다만 RE-ViBE의 정책들에 대한 세세한 평가들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답변드리자면, 첫째로 RE-ViBE의 정책들이 아주 새로운 것은 없을 수 있습니다. RE-ViBE 선본은 지난 10년간 관악 단대 학생회 및 총학생회 선거 공약 전체를 연구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현 사회대에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책들은 다시 받아 안았습니다. 다만 지난 3년간 사회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선본들의 공약들과 비교할 때, 현재 제시된 정책들이 새롭지 않다는 것은 조금은 과한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과/반 주간 등과 자율적 학술 네트워크와 관련된 정책들은, 분명 기존의 사회대 학생회가 사업을 '제공하는' 혹은 투쟁을 만들어내는 방식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거정책은 새로움도 중요하지만, 현재 얼마나 적실한가를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RE-ViBE 선본은 사회대 학우들이 전반적으로 학술과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학우대중은 새로운 정치와 조직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으되, 아직 학술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RE-ViBE 선본은 이 새로운 정치와 조직의 방식으로 참여 가능한 정치, 여성주의에 근거한 정치, 학우들의 일상을 담지해내는 정치, 즐거운 정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학우들의 삶의 문제들을 받아 안으며, 이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방식들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우들의 생활 문화와 즐거움이 인터넷 등에 맞춰져 있다면, 이를 다시 학생사회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RE-ViBE 선본원 몇몇이 참여했던 서울대 법인화 반대 플래시몹이나, 여성주의 연극, 다큐멘터리 영상제, 뉴레프트 책읽기모임 등의 행사들은 참여자들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잃지 않은 행사들이었습니다. 현재 기층 학생회에서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이렇듯 정치적 옳음과 실천의 즐거움이 결합될 수 있는 방식들을 찾아내는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반 주간, 여학우 놀이터, 사회과학제 등은 단지 딱딱한 '학술' 행사 혹은 사회대 학생회가 만들어서 공급하는 행사이기보다는, 역으로 학우들의 창의적인 실천들을 발견해나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사회대 학우들이 자발적으로 또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이 보장될 때, 저희는 분명 새로운 실천들이 발견되고 또 진화할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단번에 새로운 정치적인 장들을 보장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학우들의 직접 참여를 강조하고, 즐거운 정치를 강조하는 시도들이야말로 이후 학생사회의 복원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성 : (다른 수준/단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관악의 여성운동은 급격하게 축소되고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른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이 문제의 주된 본질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여성운동이 대중운동이 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이슈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내 여성운동은 10여년 가까운 기간 동안 반성폭력운동을 주된 근거로 삼아 왔는데, 이는 분명 일정한 성과도 거두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오히려 다수의 학우들에게 적대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금지규율로 이루어져 있는 반성폭력운동은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 낼 동력이 없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합니다. 저는 학내 여성운동이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서서, (그리고 반성폭력 운동이 처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억압에 대한 대안과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새로이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RE-VIBE 선본의 여성정책은 여성공동체의 형성과 반성폭력 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기존의 학내 여성운동의 방향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최근 학내 여성주의 운동의 위기와 반성폭력 운동의 정체에 대한 RE-VIBE 선본의 평가와 대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준용 : RE-ViBE 선본은 여성운동이 대중운동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성운동이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이슈에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운동은 그 시작부터 대중운동이었으며, 이는 반성폭력 운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RE-ViBE 선본은 여성운동과 학내 여성운동의 핵심이었던 반성폭력 운동이 현재 축소되어 대중운동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여성주의는 시혜 혹은 매너로 사고되기 십상입니다. 성폭력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스킨십을 자제해야 한다든가, 성적 욕설은 여성 앞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식의 '매너'가 반성폭력 운동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남성이 더욱 우월한 주체이기에 실천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식의, 여전히 반여성주의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성폭력 운동이 이미 성과를 거뒀다거나, 남성만을 배제한다거나, 지나치게 과격하다든가, 반성폭력 운동에 대해 침묵하는 등의 발화 혹은 행위는 그 태반이 사실상 반여성주의의 반격입니다. 이는 정치적 좌/우와 실천의 정도를 넘어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상으로부터 이성애중심적인, 반여성적인, 성폭력적인 발화들과 생각 자체를 바꿔내는 과정이 분명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여성주의는 '운동권들의 이론적/정치적 순결' 정도로만 사고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 하에서 반성폭력 운동은 이제는 여성노동권의 발화 등의 주제로 방점이 옮겨져야 한다는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RE-ViBE 선본은 반성폭력 운동은 여전히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도, 그 의의와 가능성을 잃지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성억압에 대한 대안과 강령이 더욱 폭넓게 논의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학내에서 운동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성폭력 운동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운동은 대중운동이어야 하고,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져야 함은 분명하지만, 운동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밝혀내고 이를 바꿔내기 위한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의 원활함과는 별개로, 반드시 지켜내야 할 '옳음'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부성 : 의사진행 발언. 마지막 질문은 발제 때 답변이 된 듯하다. 추가질문 하겠다.

 

구현 : 세 개 이하의 추가질문 부탁드린다.

 

부성 : 우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추가질문 하겠다. 대중운동으로서의 반성폭력 운동을 위해서는 학우들의 요구로 만들어지는 요구여야.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제 생각은 반성폭력 운동이 필요없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여성억압을 해결하고 반성폭력 운동을 위해 대안과 강령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논증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준용 : 크게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반성폭력 운동을 자신들의 이야기로부터 만들어지 못한 것이 문제. 어떻게 복원시킬지에 대한 의문이 대한 논의. 아래로부터 경험으로부터 이야기로부터 반성폭력 내규라는 게 도출되어야. 여성국이라든가 하는 정책들이 몇가지 제시가 되어있는 상태. 반성폭력 내규로 진전. 그 후로 어떤 사회? 가장 개인적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여성주의가 민주주의, 실천들을 윟해서 필요함을 알려나가야.

 

부성 : 세 번째 질문에 대한 추가질문이다. 세가지 위기를 병렬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지윤 : 정치 위기와 경제 위기는 분리가 불가능. 여성의 위기 또한 자본주의 위기 곡선에 따라 부각되었음. 빅토리아 가족-> 아메리카 핵가족. 지금 가족의 위기를 맞고 있음. 이것들 전부 분리가 될 수 없다. 경제 위기에 대해서는 금융화에 대한 분석 필요. 대안적인 학술이 필요할 것이며, 금융화의 모습에서 들어나는 다수의 궁핍화 극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 빈곤문제에까지 의제를 넓혀가야. 정치의 위기. 대중 스스로 일상과 정치를 분리하지 않을 것.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장벽을 넘어서는 실천. 연대를 사고할 수 있는 공간 구성. 여성의 위기. 계급 해방이 곧 여성 해방으로 흐르지 않은 것을 기존 혁명에서 알 수 있음. 지금은 가족의 위기. 새로운 관계 제시. 지금의 가족의 위기에 기반한 경제의 위기, 맞물려 있는 세가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댕안.

 

구현 : 다음 질의?

 

부성 : 끝내겠다.

 

구현 : 다음으로 학사정연에서의 질의응답을 진행하겠다. 상일 질의 시작해달라

 

상일 : 은폐된 폭력성과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활동은 학생(회)운동진영을 포함한 모든 운동진영의 일차적 목표입니다. 또한 그 운동이 학우대중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의 문제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것 역시 기존의 학생회들도 가지고 있던 생각-그것이 원활히 이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인 것 같습니다. 리바이브 선본에서는 이러한 학생(회)운동의 기본적 역할들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을 말씀하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지윤 : 지적하신 대로 원안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 은폐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활동은 모든 운동집단의 일차적 목표, 그러나 X 그것이 지금 문제의 원인. 그것보다 다른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 방점을 찍고 싶다. 그동안은 다른 학생운동 진영 내에서 연대나 이런 것에 대해 자보를 부착하거나 논쟁을 하는 것이 시도되어왔다면 이제 거기에서 은폐된 폭력성과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 여성주의가 여성 권익을 위한 게 아니라는 합의가 있다면 여성국 활동은 은폐된 폭력성과 권력관계를 타파하는 자리가 될 것. 두 번째로 실천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 학생회와 학우들간 권력관계를 좁히고 전도하는 시도. 학생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학술활동에서의 민주화, 직접 학우들이 주제를 선정 제안하는 자리. 사회대를 꾸려나가면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직접적으로 사고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

 

상일 : 다음으로 ‘정치의 문턱을 낮추어야한다’는 명제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급진적 정치토론을 자제해야한다는 것이나 세련된 정책으로 구현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셨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지금까지 정치의 문턱이 높았다고 판단하신다면 어떠한 기준에 근거한 것인지, 또 정치의 문턱이라는 것은 어떻게 낮출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지윤 : 앞에서 부성학우의 질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지금 학우는 술자리나 인터넷에서의 정견 표출은 익숙하다. 그러나 실제 정치는 학생회에 관심있는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실제 정치 참여의 문턱이 높았다. 법인화 토론회 참여 등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자리로서의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학생회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중단없는 상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를 희석화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지금까지 제시되어왔던 세미나 등보다 훨씬 친근한 자리에서의 토론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

 

상일 : 리바이브 선본에서는 페미니즘이 학생사회의 정치, 관계맺음, 민주주의의 원칙을 세우는 데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작동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학사정연 역시 성평등을 위한 운동은 공동체 내에서 필요한 주요한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페미니즘이 어떠한 페미니즘‘운동’으로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져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리바이브 선본에서는 ‘여학우 놀이터’라는 정책으로 대안생리대 만들기, 댄스 파티, 조금 수상한 대화, 액션스쿨, 뮤직 페스티벌, 언니팀 스포츠 등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 정책들은 학생사회 공동체 내에서 여성들의 연대의식을 확장시키면서 남성중심적 문화를 집단적으로 고민하고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위의 목표들을 달성하는 데에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오늘날 대학생 계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매우 불안정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취업의 문은 더 좁습니다. 2008년 남녀고용평등지표는 57.4%로 여성의 고용상 지위가 남성에 비해 절반 이상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여성과 남성의 고용불평등은 소위 상위계층에도 해당되는데, 세계경제포럼(WEF)의 조사에 따르면, 남한 여성의 고위공무원, 경영진 진출은 전체 134개국 중 114위를 차지했습니다. 서울대를 나온 여성 역시 차별의 문턱에 가로 막힌다는 것입니다. 이밖에 임금격차나 생리휴가, 출산휴가의 사용 불가, 작업장에서의 차별은 상당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여학우로 하여금 남학우보다도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스펙을 쌓을 것을 강제하고 있습니다. 여학우들이 현실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하는/할 불평등은 이러한 것들이라고 생각됩니다. 학사정연은 학내 페미니즘 운동 역시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바탕으로 구성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리바이브 선본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지윤 : 학우 대중들의 불만이 단순히 이윤, 굶주림 등의 이유는 아닐것. 첫 번째 문제의식 여성주의를 말할 공간이 없다. 여학우들의 경험을 긍정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 지금은 의제를 넓혀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불만이 취업, 노동시장의 착취나 차별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 직장에서의 차별과 착취만 강조하는 건 오히려 다른 폭력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닌가. 여성주의를 습득해야할 지식 따위가 아니라 경험에서의 변혁 인식. 여성주의의 흐름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 지금이 그게 필요한 시기다.

 

상일 : ‘서울대법인화’는 올해 관악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제였습니다. 법인화 찬/반 총투표는 80%의 반대율을 보여주었으며, 53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모든 선본이 함께 하는 법인화에 반대 선본연합이 꾸려지기도 했습니다. 리바이브 선본 역시 <선본연합>에 함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정책 자료집에는 법인화에 대한 리바이브 선본의 입장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2010년 사회대학생회를 준비하시는 선본으로서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계셔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법인화에 대해 리바이브 선본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며, 사회대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어떠한 활동을 준비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추가로, 리바이브 선본에서 제시하신 정책 중 ‘대안대학평가’는 서울대법인화에 대한 문제의식 중 ‘대학의 발전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학생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던지고 토론의 장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많은 학우들은 대학 발전이 세계대학순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순위는 중요하다, 취업이 잘 되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다, (어떤 방식으로 확대하든) 재정이 튼튼한 대학이 중요하다와 같은 의식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리바이브 선본에서 말씀하셨듯이 대학생 계층의 양가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식지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설문조사로 평가기준을 마련하는 방식 등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리바이브 선본은 어떠한 정책으로 이러한 의식지형에 균열을 만들어낼 계획이신지 궁금합니다.

 

지윤 : 지면부족으로 인해 법인화에 대한 입장이 실리지 못해 죄송하다. 이후에 속기록을 통해 총론 각론 부분이 들어가면 선본의 입장이 밝혀질 것. 지식의 상품화가 문제가 된다. 법인화 결정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했고, 학교가 학생이 아닌 행정 관료나 기업의 손으로 재단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 이윤과 굶주림만이 광장으로 나올 수 있는 계기는 아님. 그간 서울대생이 굶주림, 실업과 거리가 멀엇다. 대안대학평가를 통해서 학교 순위가 꼴등이더라- 등을 인식하고 터져나오길 기대하지는 않음. 결과보다 과정 그자체가 훨씬 더 중요할 것. 설문지라고 말하긴 해지만 설문지일수도 있고 토론회나 세미나, 강연회가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훨씬 많이 만나야 하고 균형을 형성. 설문지로는 부족 인식.

 

상일 : 추가질의 1. 학생회가 지금까지 소수의 전유물로 인식. 정치 문턱이 높았다. 학생회 사업이 아니더라도 논쟁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사회대학생회라는 명확한 조직에 출마를 하신 것인데 현실적으로 어떤 소통의 장을 만들려고 해도 자보, 홈페이지 등으로 학생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여전히 정치의 문턱이 높은 상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결책이 되나. 추상적. 현실고려가 없어 보인다.

 

준용 : 현실적으로 많은 학우들이 보고, 대중적으로 보려면 학생회. 좋은 조언. 조금 애매해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 아고라 토론회 등의 사업들이 우리가 꾀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업. 저번 법인화 토론회에서 영감. 이 경우 기존 법인화 토론회에 왜 사람ㄹ이 많이 오지 않는가를 단순히 학생회가 해서- 라고 생각하지 않음. 홍보의 부족도 있겠지만 반대 선전의 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던 것이 법인화 토론회 참여 저조를 불렀다고 생각. 선동으로 보이지 않을 방식 고민. 패널을 자율적으로 모집. 찬반 토론. 부르주아적인 합리성일 수도 있으나 합리성 추구. 그리고 우리 이야기를 펼쳐내기 위한 자리. 자신감을 가지고 진행해보자. 학우들이 부자동아리 등과 같은 곳의 이야기를 듣고 넘어가지 않을까 해도. 우리 진보 계열은 자신감을 가지고 진행. 기존에 학생회의 문턱이 마냥 높은 게 아니라 애당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집행부원으로 없었던 이유.장기적인 계획하에서라면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진보적 사람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모을 수 있는 방향으로. 학우들이 우려하는 점을 충족해주면서 장기적인 계획으로 이끌어 나갈.

 

구현 : 두 번째 추가질의 부탁드린다.

 

상일 : 민주주의의원칙이란 게 노동각론, 환경 생태등을 생각할 때 관계를 명확히 설정해 놓으신 것 같다. 과반에서 민주주이ㅡ 원칙을 세운다는 것. 계급정치와 불가분. 리바이브가 말하는 페미니즘,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에 어떠한 관계가 성립하는가. 앞의 말을 참고했을 때 지금 반성폭력 운동 확장 이해. 페미니즘 운동과 계급적 관계 어떻게 사고

 

준용 : 계급문제를 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총론 각론에서도 언급. 지배계급의 공세라는 표현 사용함. 첫째로 반성폭력 운동이 관악에서 주류였다는 것. 그러나 근 몇 년 진행이 되었는가? 반성폭력 운동이 근 몇 년간 대중운동적인 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실제적 주류가 아니었다. 반성폭운동에만 방점을 찍은 채 가e져가게다는 것은 아님. 학내에서 각 개인이 겪는 폭력의 문제, 꼭 고쳐져야 함. 이를 사고하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 여성 노동의 문제. 성과 계급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부차적이라고 사고할 수 없다. 모든 해방이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해방이라는 게 어느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할 수 없다. 노동권을 위한 프로젝트도 준비. 직장내 성희롱 등의 이야기도 진행. 반성폭력 운동이 기존 주류, 여기서 확장 이 아니라, 이제까지 현실적으로 반성폭력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 방점을 찍고 제대로 전개해나가야.

구현 : 마지막 질의

 

상일 : 법인화에 대한 선전, 문제의식 공유가 비교적 충분히 이루어졌다. 선전보다 실행. 기말고사와 겨울방학이 끼어있고 곧 새맞이 기간. 구체적으로 어떻게 법인화 투쟁. 사회대가 관악 학생운동에서 선두적인 역할해야한다고 생각. 리바이브가 차기 학생회 구축 후 법인화에 대한 어떤 전략을 갖고 대응할 것인가.

 

준용 : 단순한 선전의 시기가 아니다, 동의. 선본 내부에서 드러난 것은 법인화에 반대하지만 학우들을 설득, 실천에 이끌 방법을 모른다는 것. 실제로 많은 학우들이 실천을 같이 해달라고 할 때 쉽지 않을것. 학우들의 합의를 기반으로 투쟁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것 각 과반과 학생회 차원에서 중요. 당장 겨울방학이 온다. 흐름과 협의 만들어내야. 재확인이 아니라 구체적 투쟁전술 논의 필요. 학우들이 실제로 모여서 투쟁전술을 논의할 자리가 겨울방학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 사회대가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 단대학생회가 단발적인 투쟁체가 아닌 총학생회 산하의 투쟁체를 건설할 것. 학내외의 투쟁 단위 모두 모여서. 스쿨어택 높이 평가. 한 두 개 정파나 조직이 아닌 전 총학생회적인 기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본연합 등과 결이 다르지 않을 것. 그 안에서 진행이 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상황을 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학내로부터 투쟁의 흐름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요원하다. 당선되는 즉시 학우들과 이야기. 단지 재확인이 아닌 투쟁의 전략을 짜는 것. 전체 관악에 제안, 교투특위와 유사한 투쟁체 결사. 올해 이후까지도 투쟁 이어져야. 전반적인 교육의 재편 자체를 막을 수 있는 투쟁기구 건설 목표.

 

구현 : 마지막 순서 개인질의. 하실 분 손 들어달라.

 

준용 : 추가 가능?

 

구현 : 가능

 

준용 : 교투특위라고 사례를 들었다. 한계 존재. 단순한 한 시기의 법인화 투쟁 고려보다는 학교 본부측에 자의적인 교제재편 등을 반대할 수 있는 상설적인 기구 설립을 사고.

 

구현 : 이어서 개인질의 있으신 분 손 들어달라.

 

사회대 비반 09 동훈 : 장기적 안목 질문. 어떻게 학생 참여를 이끌어내는가. 흩어져있는 진보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기반을 구축하자고 정책 방향을 내어놓고 있다. 그럼 지금 그런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포섭해서 활동을 하게 만들것인가

 

준용 : 어떻게 헤게모니 자체를 장악? 맞나. 정당성과 자발적 합의에 기초. 학내에서만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다. 학우들의 실천, 학우들의 경쟁. 학우들의 학점에 대한 집착. 사회적인 흐름을 같이 고민해야 학내 헤게모니 장악을 얘기할 수 있다. 무엇을 옳음으로 상정하고 사회적 투쟁으로 이것을 만들어나갈 것. 사회적인 흐름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 필요한가? 기층에서부터 균열을 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모이고 말이 만들어지고 실천이 만들어질 때 대학생이 정치주체화. 실천.

 

경제 비반 08 미르 : 학생회가 안 선 과반이 많다. 운영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 네 개 과반에서만 지금 학생회가 선다. 의사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윤 : 지속적인 의사결정기구 별개로 구성.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 사회대 학생회라는 공간 안에서 기층에서부터의 합의 없이 던져놓는 것은 강요가 될 수 있다. 당선이 된다면 그 후로 만들어내가야 할 문제. 과반 한명한명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배치 - 기본적 사안이라고 생각.

 

구현 : 다른 질의 있으신 분은 손 들어달라. 없나. 마지막으로 열을 세겠다. 없는 것같다. 개인질의응답을 마친다. 수고들 하셨다. 오늘 이야기되어던 것은 속기록으로 올리고 비치도 하겠다. 이것으로 정책간담회를 마치도록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