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간담회 후기라지만, 지금은 휴학쓰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지라, 올해 정책간담회에 직접 참가는 못하였고, 속기록만을 토대로 읽고 느낀 점을 아래에 적어봅니다. 그래서 오해도 있을 수 있고, 성질 머리 없는 사람이라 단어 하나에 발끈한 대목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쪼록 읽어주시고 고민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거침없는 태클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래 글부터는 반말의 건방진 어투로 시작됩니다. 

1

 

 "... 홍보의 부족도 있겠지만 반대 선전의 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던 것이 법인화 토론회 참여 저조를 불렀다고 생각. 선동으로 보이지 않을 방식 고민. 패널을 자율적으로 모집. 찬반 토론. 부르주아적인 합리성일 수도 있으나 합리성 추구... "

-올해 정책간담회 속기록 중에서

 

 후 ...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건가? 법인화에 대한 관심이 없는게 반대 선전의 장이 될까봐? 관심 없는 그 사람들이 굳이 당신과 대화하고 설득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도대체 반대 의견을 가진 당신과 우리가 대화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지? 그 대화가 도대체 무엇을 바꾸게 되는 것일까? 이 선본이 말하는 토론회가 몇몇 학우들에게 가질 수 있는 매력이란 학술적 담론 경쟁이 보여주는 지적 유희는 아닐까?

 

 가장 격렬한 논쟁은 그 논쟁의 향방이 권력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학생회는 학생회가 지닐 수 있는 약간의 권위와 권력(구체적으로 말해, 정치적 의제를 선점하고, 이에 대한 학생회 자신의 '편파적' 의견과 계획을 내놓고, 이를 독점적이고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한)조차도 정치 참여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해소하자고 한다. (즉, "학생회는 법인화 찬성 의견도 반대 의견과 동일한 비중으로 선전해야 한다!"는 것.)

 

 집단화, 실행력, 저 집단이 뭔가를 저지를 것이다... 이것이 그 집단과의 활발한 논쟁의 전제조건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도대체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지방의 무수한 고립된 학생 활동가들을 살펴보라. 내가 만나본 지방의 어떤 학생활동가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비록 나의 정치적 지향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그 정치 집단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고... "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나 간단하다. 개인에게 없는 실행력이 정치집단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 지속시키면서 그 집단을 조금씩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더러운 자본가국가의 부름을 받아 의무(?)를 수행 중인 '압둘라'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정책 간담회에서 남긴 적이 있다.

 

 "지난 교육투쟁의 본부 점거를 둘러싸고 벌어진 광범위한 반발(?)들을 보라. 소통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소통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쏠린 이 거대한 부정적 관심을 활용하고 정면으로 돌파해 가야 한다."(70~80%의 미화 및 각색 들어감.)

 

 법인화 토론이 "반대 선전의 장은 아닌가?"란 대중의 의심을 불식시키고 싶은가? 그 자리에 진지하게 대면해 볼 만한 찬성 의견을 그토록 불러들이고 싶은가? 2005년 교육투쟁의 사례를 보라. 본부 점거는 점거를 둘러싼 격렬한 찬반 논쟁을 자발적으로 불러일으킨 시발점이었다.

 

2

 

 2006년 있었던 04들 간의 선본통합 논의에서 자칭 C급 좌파(물론 나는 그가 C급 따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다음과 같은 일갈을 날린 적이 있다.

 

 "너희들은 마치 권력을 쥐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정말로 실제 세워질 학생회에 어떠한 권력도 존재하지 않게 될까? 너희들은 학생회장이 단지 우애로운 소통의 공정한 사회자라고 생각하지만 그 공정한 사회자의 위치는 결국 특정한 정치적 성향의 누군가가 차지하게 되어 있고, 토론자들은 그 사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나는 그/녀들이 결국 틀린 것으로 판명나리라 생각하며 냉소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녀들은 그/녀들이 아무리 부정한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권력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 있으며 그리하여 그 정치적 권력이 사회대의 판도에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노골화하고 승인한다기 보다는 비가시화한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가진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라고. 정책간담회 속기록에서 '부르주아적 합리성'이란 단어를 읽었다. 그렇다. 부르주아적 합리성이 바로 이것이다. 이놈의 자유민주주의는 도대체 이 민주주의가 근본적 배제와 권력관계 및 폭력을 통해 작동하고 있음을 승인하려 들지 않는다. 이 민주주의는 자신이 온갖 영역에서 권력을 해체하고 모든 정치적 의제들이 우애롭게 교환될 수 있게 노력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의제들'의 동등함과 우애로운 교환관계를 유지하려는 형식 자체는 공고한 권력에 의해 유지된다.

 

 우리의 실망은 명료하다. 이 우애로운 교환관계는 언제나 무의식적 권력을 담지한다. 그리고 현실적 자원과 시간의 한계는 언제나 교환관계에서 배제되고 깎여져 나갈 정치적 의제들을 만들어 낸다.(게다가 이번 학생회는 페미니즘 사업을 1년 내내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공약하지 않았는가? 즉 이 의제에 한해서 이들은 일정한 자원과 시간은 언제나 약속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를 승인하는 것이 권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분노하면, 이들은 "주어진 자원의 한계 내에서 모든 의제들을 공정히 다루려 노력했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 속에서 단칼에 잘려져 나간 무엇은 존재한다. 바로, 주어진 자원과 시간, 나아가 주어진 판 자체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의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다. 즉, 대의(물론 그/녀들이 진심으로 혐오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잘려져 나간다.

 

 3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듯한 청년의 모습만 눈앞에 보일지라도 청년들은 세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세계화의 거대한 피해자가 누구고 누가 전쟁으로 돈을 벌고 누가 생명을 잃는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어디에나 숨어있다.

-올해 정책간담회 속기록 중에서

 

 모든 정치적 사안에 무관심해 보이고, 오로지 자기 영달을 좇는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이던 내 옆의 친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 속에서 느끼는 모순이라는 균열을 포착하는 것에서부터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학생들은 수많은일정들로 바쁜 생활을 보내면서도 진보적인 인사들의 강연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취업 준비나 영어 공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지침을 얻고자 하기도 하고. 사회적 기업 동아리에 들거나 기부에 많은 관심을 갖기도 한다. 또한 한시라도 자기계발을 계속하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더 열심히 자기계발 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대학 생활 4년을 보내버리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 일인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때로는 공동체의 유대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호소하기도 한다. 정치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도 읽을 수 있다. 이번 법인화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학우들은 나름대로 학내외 주요 사안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어떤 통로를 통해 정보를 얻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정책간담회 속기록 중에서

 

 속기록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들의 얘기의 일부분을 도식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우들의 양가성 -> 그런데 학생회는 학우들과 소통하지 않았기에 학우들의 이 양가적 고민을 잘 읽어내지 못함. -> 학생회는 학우들과 소통하여 이 양가적 고민을 읽어내어 활동해야 함.

 

 이게 참 재미있는 얘기인데, 이 얘기에서 학생회의 구성인자들은 마치 학우들 중의 일부가 아닌 양, 학생회 바깥의 학우들의 양가적 감수성에 대해 어느 것 하나도 잘 알지 못 한다고 상정되고 있다. 자기들만 빼고 지금까지의 학생회 모두가 그렇게 학우들의 양가적 감수성과 고민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양가성의 논리는 그 논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이미' 학우들의 양가적 고민을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당신은 학우들의 머리 뚜겅을 열어보았는가? 당신은 어떻게 해서 저기 저 사람이 당신이 말하는 '현실 안주'와 '저항'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라고 눈치챌 수 있었는가? 아무튼, 당신은 저 존재가 당신과 같이 고민하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전제한다. 당신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양가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렇지만 우리 학생회는 학우들의 고민을 잘 모르니까 학우들과 좀 더 소통해봐야 해!" 라고 주장하는 건 정말이지 웃기는 얘기란 거다. 양가성의 논리는 마음을 꿰뚫어 본 이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전제이다. 따라서 이 논리는 학우들의 섬세한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소통의 필요성이 아니라, 결의와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복무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실, 나는 정책 간담회 속기록에서 학우들이 '현실 안주'와 '저항' 사이에서 진동하는 존재로 그려졌을 때 의아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양가적 존재성에 대한 강조는 '보다 급진적 저항', '행동하는 전위'의 필요성과 정당성의 근거로 자주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양가성의 논리는, 무수한 '진심'들 사이에서 '결심'하는 행위가 가능하고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즉 이 논리는 '결의'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너(대중)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만, 사실 저항에 대한 고민과 지향도 품고 있어! 나의 외침은 단지 외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네 내부의 목소리이기도 해. 함께 연대하고 행동하여 이 파국을 헤쳐나가보는 건 어떻겠니?" "이것도 네 진심이고 그것도 네 진심이지. 그러나 난 그런 변하는 네 일시적 마음들에는 관심이 없어. 네 결심은 무엇이니?" 등등.

 

 어쩌면, 이번 학생회의 구성원들은 '양가성'을, 이 교착상태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이 교착상태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대중들에게 "이봐 난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진지하기만한 사람은 아니라구. 난 이렇게 즐길 줄도 알아."라는 식의 어필은 필자에게조차 매력적인 포지션이다. 어느 하나의 마음에 무게를 주지 않고, 이 마음 저 마음 둥둥 떠돌아다닐 수 있음을, 그렇게 꽉 막히지 않았으며 이것저것 다 알고 있다는 식의 '지혜로움'을 대중들 앞에서 내비치는 것. 열내고 성내고 몰입된 이가 아닌, 세련되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한 인간임을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어찌 매력적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게 될 때 이들은  섬세한 진동의 소유자인 '양가적 대중'과 전혀 다를바 없다. 이들은 '대중'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양가적 대중'들이야 말로 바로 그런 교착상태의 매력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특징 짓는, "모든 삶의 방식을 잘 아는" 지혜로운 자들.

 마지막 두 개의 문단은 나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