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한 사회대 학생회의 입장서입니다. 
두 번의 단운위를 거쳐 의결받았습니다.

[12.28 패배, 그 이후의 고민]

 합의 유감

작년 12월 28일 한국 외교부장관과 일본 외무상이 서울에서 만나 위안부 문제 관련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한다는 이 합의는, 50년 전의 한일 협정만큼이나 굴욕적인 협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95년 내각총리대신 무라야마의 편지를 그대로 베껴온 듯한 일본 측 사과문은 여전히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재단 설립 비용 10억 엔 지원이라는 약속도 1995년의 ‘아시아여성기금’ 조성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수준이다. 이렇듯 한국은 일본에게서 어떤 것도 새로 얻어내지 못했지만, 한국 측은 소녀상 이전 및 국제사회에서의 비판 자제 등 일본 측 요구들을 수용했다. 게다가 양국은 이번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데 동의해버렸다. 양국 외교 당국자들이 만나 기존 일본의 입장과 동일한 내용을 공동합의문의 형식으로 발표하되, 위안부 운동의 발목을 잡는 독소조항을 추가하여 문제를 완전히 종결짓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그동안 위안부 운동이 추구해온 방향에서 보면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한, 철저히 후퇴한 합의이다.

 무엇을 위한 합의인가

그런데 2월 2일 한국 외교부는 이번 합의가 “‘난제 중에 난제’를” 해결한 “귀중한 합의”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정부가 이번 합의를 성공한 합의라고 규정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 합의를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이번 공동합의문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미국 중심의 한-미-일 군사동맹이라는 국제정치적 이해관계가 있다. 미일 양국은 최근 군사동맹 가속화 절차를 밟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한국 역시 일본 측과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문제를 놓고 수차례 회의를 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간 중대한 갈등 요인인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은 물론 한미일 동맹을 주도하는 미국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하여 미국은 하원에서 일본에 위안부 문제 책임 인정 및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라며 양국 정부를 압박해 왔다. 결국 한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한국과 일본 정부가 양국 간의 외교 갈등을 ‘해결’한 것이 이번 합의인 것이다. 애초에 한국 정부가 이번 합의에서 염두에 둔 것은 위안부 당사자들의 요구가 아니라 외교문제의 해결이라는 ‘국가적’ 과제였고, 결국 그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한 셈이다. ‘당사자를 배제한 협상’이라는 비판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

국가라는 괴물

 위안부 운동은 1991년 김학순씨의 피해사실 고백으로 본격화되었고, 줄곧 피해 당사자들이 투쟁의 주체로 활동해왔던 운동이다. 그러나 이번 한일공동합의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외교 협상을 통해 처리해야 할 사안으로 취급해 버렸다. 따라서 문제의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입장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이번 합의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비판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 나아간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위안부운동은 한일 국가 간 협상에서 한국 정부에 무엇을 얼마만큼 기대할 수 있었을까? 이번 공동합의문 발표가 잘 보여주듯, 국가기구는 철저하게 국내 및 국제 정치에서 조성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 없이 막연히 국가가 도덕적 책임을 질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태도이다. 문제는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피해 당사자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 하여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측정되는 이익에 당사자들이 요구하는 가치는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당사자들과 운동주체들이 배제되지 않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있다. 국가기구는 도덕적 요구‘만으로’ 교화할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압력으로 굴복시켜야 할 괴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에 도덕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요구가 강제성을 띠게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러 차례의 사과 표명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 적이 없다. 따라서 여전히 위안부 운동이 한일 양국 정부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상기했듯 이런 요구들을 국가기구를 향해 외쳐대는 것만으로는 상황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 위안부 운동의 요구들은 단지 요구에 그쳐서는 안 되며 실질적 힘을 갖춘 명령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운동의 동력이자 투쟁의 주체인 위안부 피해당사자들이 정치적 힘을 거머쥘 수 있도록, 다양한 세력들이 당사자를 중심으로 한 연대에 나서야 한다. 이로써 당사자들과 운동 주체들이 충분한 현실적 힘을 획득했을 때, 국가라는 괴물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합의에서 우리는 한국정부의 실패가 아니라 한일 양 국가에 대한 위안부 운동의 패배를 진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 패배는 더 많은 것을 함축한다. 외교문제의 해결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의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가 무시당하는 것처럼, 대학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학생사회 구성원인 우리들의 존재는 너무 쉽게 지워져버린다. 그리고 국가경제의 활성화라는 요란한 표어는 존엄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값싸고 유연화된 노동시장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학생운동과 위안부운동은 국가라는 괴물에 맞서는 동일한 전선 앞에 서 있다. 따라서 위안부 운동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물론 학생운동의 입장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는 일정한 정치적 힘을 가진 세력으로 결집하여 위안부 피해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12.28 패배를 딛고 승리의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사유와 실천에 나서자.

진보의 요람, 제34대 관악 사회대 학생회